화성행궁

2019. 4. 18. 12:36체험학습

정조의 효심이 지은 화성행궁

수원을 팔달산 아래로 옮긴 초기에 세워. 이때는 전각 한 채만 있었는데 화성 성곽 쌓으면서 행궁 다시 크게 짓다.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름? 봉수당: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한다는 뜻

신풍루: 한나라 고조 고향 풍패의 풍자를 따서 붙인 것.

장락당: 오랜 즐거움. 제일 먼저 공사한 곳. 혜경궁 홍씨 머무를 정조의 효심 깊이 배어 있는 이름.

 

 

이향숙, <화성에 가자>, 기탄출판(2008)

 

머물던 곳.

축하하는 뜻

봉수당 남쪽으로 긴 행랑을 연결하여 그 끝에 2층 누문인 경룡관지어. 왜 봉수당에 행랑 연결해서 지은 줄 아니? 어머니가 봉수당을 지나지 않고도 바로 장락당으로 가실 수 있도록 한 거.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의 세심한 배려가 듬뿍 담겨 있어.

봉수당 남쪽에 이어져 있는 행랑 덕분에 홍씨는 편안하게 장락당으로 갈 수 있어.

 

화성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 가난한 사람 뽑아 쌀, 죽줌.

 

낙남헌: 경로잔치. 서울에서 임금님과 함께 내려온 관리들 가운데 나이 많은 신하, 화성 사는 노인 초대. 술 음식 대접

 

수원 화성은 정조의 명으로 지어진 신도시. 본래 수원이라는 고을은 융릉(사도세자 무덤)에 있었다. 수원은 조선에서 제일 좋은 무덤터로 알려진 곳. 효심 깊은 정조 아빠위해 백성들 모두 이사 가도록 명령하고 그곳에 사도세자 무덤 꾸민 것. 집터 잃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곳으로 옮겨 살도록 했는데, 그곳이 수원 화성이 자리 잡은 팔달산 아래.

 

조선시대 신도시 화성

정조가 수원을 다른 장소로 옮겨 새롭게 도시 만든 이유? 1.효심 2.팔달산 아래가 신도시 꾸미기에 알맞은 곳이라. 팔달산 아래 땅 평탄, 남쪽지방 물자 서울로 운반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경제중심지로 가장 좋은 곳. 신도시 건설 신하들 반대 있게 마련. 아버지 묘소 좋은 자리에 만들기 위해서라면 신하들도 신도시 건설에 반대하지 못할 것을 정조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 같다.

 

 

득중정: 정조 활쏘기.

 

화약 터트려 불꽃놀이: 화약 이름 매화포.

 

지지대고개:지지(꾸물꾸물 지체함) 정조가 눈물로 넘던 고개. 느려지고 느려져.

 

수원화성을 만든 사람들?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 실학자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 1789(정조13)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 용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 전쟁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 왕이 지방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화성행궁)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 건설, 성곽 축조. 1790~95(정조 1419)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설치. 그 중 화성행궁은 규모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

 

화성행궁은 평상시 화성부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활용. 정조는 1789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 거행.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 거행. 정조 승하한 뒤 순조 1(1801) 행궁 옆에 화령전 건립. 정조의 진영(眞影) 봉안.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10, 일반에게 공개.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좌익문 전경사진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중앙문 전경사진

 

 

중양문(中陽門)

 

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 전경사진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정조 13)819일 상량하고 9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

 

 

 

 

 

유여택 전경사진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장락당 전경사진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복내당 전경사진

 

 

복내당(福內堂)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낙남헌 전경사진

 

 

낙남헌(洛南轩)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정조 18)에 완공되었다. 1795(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노래당 전경사진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1794(정조 18) 행궁을 증축할 때 5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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