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검이 창으로도 쓰였을까?

2020. 1. 10. 14:53중앙박물관

[오마이뉴스 송영대 기자]

청동기시대엔 역시 청동검도 많이 쓰였다. 이러한 청동검 중에서 한국의 무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다. 국사책에서도 많이 보아서 꽤 익숙한 이 무기들은, 그 형태부터가 다른 곳의 청동검과 비교해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나 북방의 청동검이 칼날과 손잡이가 하나인데 반해서, 한국의 청동검은 칼날과 짧은 슴베가 특징이다.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비파형동검

 
 

비파형동검을 요령식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요령식동검이란 본디 요령지방에서 출토되어서 그러한 명칭이 붙은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러한 비파형동검의 기원이 요령지역, 즉 요서지역과 요동지역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쪽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였기에 그 관계에 대해 학자들도 관심이 많다.

혹자는 이 비파형동검을 고조선의 무기라고도 한다. 그래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고, 실제 국사책에서도 그렇게 말하긴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들도 많다. 단순히 고조선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보기엔 그 범위가 매우 넓고, 또한 시대적 편차도 크기 때문이다.

비파형동검이 본래 있었던 곳이 만주지방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내에도 60여점 가량이 발굴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파형동검을 보면 생기는 의문이 하나 있다. 과연 이것을 들고 싸우는 게 가능하였을까?

우선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파형동검을 들었을 때 슴베가 짧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실제 비파형동검의 슴베는 거의 5cm 이내로서, 잡는 부분이 짧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싸우기에는 힘든 측면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는 별도로 손잡이를 하나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손잡이에 끼워서 이를 잡고 적과 싸우게 되는데, 이 손잡이뿐만 아니라 손잡이 끝부분에도 장식을 만들어서 붙여 놓는다.

이러한 비파형동검을 곡인청동단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명칭은 주로 중국에서 부르는 명칭인데, 이처럼 비파형동검과 같은 검들은 단검에 속한다. 앞서 말했던 간돌검이나 세형동검 등도 모두 단검에 속하는데, 일반적으로 단검은 60cm 이하의 검을 지칭한다. 전쟁에서 단검의 사용은 많았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주력무기로 사용되진 않았다. 주력무기의 자리는 다수가 창이 맡았는데, 이는 거리상에서 검이나 칼과는 차이가 크고, 단체가 한 팀이 되어서 싸우기에도 편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검을 주력 무기로 쓰는 경우도 없진 않다.

좀 더 날렵하고 세련된 세형동검

 
 

비파형동검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세형동검이다. 세형동검은 한국식동검이라고도 불리며, 말 그대로 주로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비파형동검에 비해서 훨씬 날렵하며, 슴베는 훨씬 짧아서 2~3cm 정도에 그친다. 이에도 역시 별도의 손잡이를 붙여서 사용하게 된다.

이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과 달리 칼날에 피홈, 즉 혈구가 있다. 이는 상대를 찔렀을 때 그 피가 좀 더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처리한 장치로서, 이게 실전에서 사용되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물론 이로부터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오는 무기의 피홈 같은 경우, 실전용이 아닌 그냥 형식적으로만 넣어 두는 것들도 있지만 말이다.

이 세형동검은 비록 청동검이면서도 시대는 초기철기시대로 분류된다. 이때부터 이미 철기류가 들어오게 되었으며, 청동기도 더욱 발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철은 등장하자마자 바로 청동과 교체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철은 도리어 청동보다 더 무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탄소를 넣고 그 비율을 조절함으로써 강철이 생산되고, 결국 이는 청동과 교체되게 된다.

세형동검의 후반에 들어서는 칼집이 있는 것도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청동검 중에서 칼집이 있는 것은 생각보다도 그 출토량이 별로 많지는 않은 편이다.

우리의 청동검과는 다른 형태를 한 중국식동검

 
 

우리나라에선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 외에 중국식동검이라는 것도 출토된다. 이를 문헌의 명칭을 따서 도씨검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의 청동검과는 달리 손잡이가 달려있는 단검이다. 한손으로 쥐고 싸우기에 편하게 되어 있으며, 출토되는 것들을 보면 중국에서 들여온 것도 있지만,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만든 것도 있다.

이 중에서 완주 상림리에서 출토된 것은 무려 그 수량이 26점이나 된다. 이들은 출토 당시 검 끝이 한 방향을 향한 채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의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러한 중국식청동검과 같은 방식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여럿 보인다. 다만 그 형태는 독특하다고 하게지만, 단순 독특함을 따진다면 우리의 청동검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 중에서는 그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그러한 것도 모두 청동검의 범주에 넣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 당연시하게 처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청동기시대에 비파형동모나 투겁창은 생각보다 그다지 많이 출토되지는 않는 편이다. 꺾창도 기마전 등에서는 효율적이겠지만,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전투할 땐 약간 비효율적이며, 본격적인 기마전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단검은 전투에서 거의 보조무기임에 반해, 창이나 활은 주력무기로 사용되었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직접 전투에서 사용했으면 단검보다는 창이 좀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청동기시대는 촌락간의 전투가 잦았던 시대이다.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는 목책과 해자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훗날 성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서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이다. 이렇게 싸움이 잦았기에 그에 따른 시설을 만들어 놓았는데, 정작 전투에서는 그 효용성이 떨어지는 청동검을 널리 사용하였을지 의문이다. 사실 그런 점도 있어서, 이러한 청동검을 실전용보다는 제사장이 지니는 의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청동검이 의기이고, 간돌검 등으로 싸웠다면, 애초에 이는 굉장한 손해라 하겠다.

청동검이 청동창으로도 쓰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여기에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청동검이 검이 맞을 수도 있지만, 더불어 창으로도 쓰일 수 있지 않았을까? 나무로 된 자루에다가 청동검을 넣고 사용했다면 이를 그보다 더 긴 자루에 넣고 사용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더구나 그렇게 사용하면 좀 더 유용하게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고 말이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는 ‘피(?)’라는 무기가 쓰였다고 한다. 중국 문헌을 보면 이 ‘피’라는 무기는 검의 일종이라고도 하지만, 또한 대모(大矛), 즉 큰 창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이 무기는 생김새는 그 당시에 쓰였던 청동검과 비슷하나, 긴 자루에 장착시켜서 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진시황릉 발굴을 통해서도 밝혀졌는데, 우리의 청동검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청동검만 놓고 보았을 때 중국이나 북방의 그것보다 우리의 그것이 좀 더 전투에서는 비효율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청동검이 때로는 청동검으로, 그리고 전투 시에는 청동창으로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 자체로서도 변화무쌍한 무기가 되어 전투에서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된다. 아직 이에 따른 증거는 부족할지는 몰라도 가능성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원삼국시대에 들어서면 철기문화가 널리 보급됨으로 인하여 동병철검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그 개체수가 적어 교과서 등에서는 그다지 잘 다루지는 않지만 이번 특별전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병철검은 말 그대로 청동으로 된 손잡이에 철로 된 칼날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개중에는 옻칠한 칼집에 넣어져 출토된 것도 있어 칠초철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동병철검은 역시 단검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북방에서, 특히 부여에서는 동병철검이 단검이 아닌 장검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어 재미있는 대조가 된다. 물론 시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한반도 남부에서는 이 동병철검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고 소멸하게 된다. 결국 한나라의 칼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이는 고리자루칼로 대표되고, 그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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