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동전던지기

2020. 10. 20. 14:54궁궐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0월 6일 갑술 1번째기사 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돈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하고, 이궁을 짓도록 명하다

국역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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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양(漢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드디어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종묘(宗廟)의 문밖에 나아가서 여러 사람에게 포고(布告)하여 말하였다.

"내가 송도(松都)에 있을 때 여러 번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이변(異變)이 있었으므로,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하였더니, 정승 조준(趙浚) 이하 신도(新都)로 환도(還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자가 많았다. 그러나 신도(新都)도 또한 변고(變故)가 많았으므로, 도읍을 정하지 못하여 인심이 안정(安靜)되지 못하였다. 이제 종묘(宗廟)에 들어가 송도(松都)와 신도(新都)와 무악(毋岳)을 고(告)하고, 그 길흉(吉凶)을 점쳐 길(吉)한 데 따라 도읍을 정하겠다. 도읍을 정한 뒤에는 비록 재변(災變)이 있더라도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다."

임금이 제학(提學) 김첨(金瞻)에게 묻기를,

"무슨 물건으로 점(占)칠까?"

하니, 대답하기를,

"종묘 안에서 척전(擲錢)099) 할 수 없으니, 시초(蓍草)로 점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초(蓍草)가 없고, 또 요사이 세상에는 하지 않는 것이므로 알기가 쉽지 않으니, 길흉(吉凶)을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하니, 김과(金科)가 나와서 말하기를,

"점괘(占卦)의 글은 의심나는 것이 많으므로, 가히 정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함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 낫다. 또 척전(擲錢)도 또한 속된 일이 아니고, 중국에서도 또한 있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도읍을 정할 때 무슨 물건으로 하였는가?"

하니, 조준이 말하기를,

"역시 척전(擲錢)을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와 같다면, 지금도 또한 척전(擲錢)이 좋겠다."

하고,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대사헌 김희선(金希善)·지신사 박석명(朴錫命)·사간(司諫) 조휴(趙休)를 거느리고 묘당(廟堂)에 들어가, 상향(上香)하고 꿇어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반중(盤中)에 척전(擲錢)하게 하니, 신도(新都)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 임금이 나와 의논이 이에 정해지니, 드디어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를 상지(相地)하여 이궁(離宮)을 짓도록 명하고, 어가를 돌이켜 광나루[廣灘]에 머물러 호종하는 대신과 더불어 말하였다.

"나는 무악(毋岳)에 도읍하지 아니하였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09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99]

    척전(擲錢) : 동전(銅錢)을 던져서 점을 치던 일. 척괘(擲卦)라고도 하는데, 시초(蓍草) 대신에 흔히 사용하는 방법임. 한꺼번에 동전(銅錢) 셋을 던져 1개가 뒷면이 나오고 2개가 앞면이 나오면, 단(單)이라 하여 작대기 하나 모양으로 표시하고, 2개가 뒷면이 나오고 1개가 앞면이 나오면 탁(拆)이라 하여 작대기 두개를 나란히 놓은 모양으로 표시하고, 3개가 모두 뒷면이 나오면 중(重)이라 하여 ○로 표시하고, 3개가 모두 앞면이 나오면 순(純)이라 하여 ×로 표시하는데, 세 번 던져서 하나의 괘(卦)를 만들어 길흉(吉凶)을 판단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