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공심돈의 발생과 전파

2019. 4. 2. 12:20한국사

공심돈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은 수원화성 뿐이다. 높은 공심돈은 멀리서도 보이고 미학적으로 뛰어난 형태를 가지고 있어 화성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다. 공심돈은 순수하게 우리의 창작품이 아니고 중국에서 명나라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설의 발생과정과 우리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을 여기서 살펴보고자 한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내밀어 만든 구조물을 치(雉)라고 한다. 성벽에서 돌출된 모습이 꿩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고 유럽에선 Bastion라고 한다. 치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만들어져왔고 한반도의 고대국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치성제도(雉城制度)는 전쟁의 역사 속에 발전하여 적대(敵臺)가 되고 적대는 더욱 발전하여 공심돈(공심적대)이 된다.

적대는 본성과 높이가 같은 치성을 높게 만들어 공격력을 높이는 시설이다. 본성은 방어가 주된 목적이고 치성은 공격이 주된 목적으로 본성보다 높은 적대는 당연히 가성비(價性比)가 커진다. 수원화성의 적대는 성곽에서 가장 취약한 남·북대문의 좌우에 두어 공격력을 강화하고 있다. 공심돈(공심적대)는 적대가 발전한 제도이다. 적대는 내부가 비어있지 않고 자재로 꽉 차있는 실심적대(實心敵臺)이고 공심적대는 내부를 비워 여러 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적대는 본성보다 조금 높지만, 공심적대는 매우 높은 편이다. 수원화성의 공심돈을 엄밀히 제도상 구분하면 남공심돈과 서북공심돈는 공심적대이고 동북공심돈이 공심돈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특별히 구분이 필요하지 않으면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공심돈으로 칭한다.

수원화성에 공심돈이 설치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위대한 두 명의 전술가가 있어 가능하였다. 한명은 공심돈을 처음 만든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고 다른 이는 모원의(茅元儀, 1794~1640)로 공심적대 제도를 책으로 만들어 조선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척계광은 중국에서 공심적대를 처음 만들었고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무인집안의 출신으로 6대조 척상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부장으로 공을 세워 산동성 봉래현의 지위첨사를 후손에게 세습하게 된다. 척계광이 17세(1544년)때 아버지가 죽자 세습을 받아 지휘첨사가 된다. 어린 나이지만, 전술 전략이 뛰어나 황해연안지역에서 왜구와 전쟁을 하면서 계속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해 수 십년을 끌어온 왜구와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왜구토벌 공로로 척계광의 나이 41세(1568년)에 계주(稽州), 창평(昌平), 보정(保定) 등 3지역의 훈련책임자(練兵事務)가 된다. 이 지역에는 북방오랑캐를 막기 위한 만리장성이 있었는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각 요충지에 특별시설인 공심적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그 결과 1,489개의 공심적대를 설치되었고 이후 이 시설은 중국전역으로 퍼져 방어시설의 기준이 된다.

모원의은 15년 동안 병서 2천여권을 연구하여 중국 최대의 종합적인 병서인 무비지(武備志)를 1621년에 편집, 저술하였다. 그는 절강성의 대대로 학자 집에서 태어났으며 뛰어난 정치적 수완, 고금의 전술을 잘 알고 있어 살아있는 병학백과(兵學百科)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후금이 일어나고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는 변방의 광야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게 한다. 무비지는 24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다섯 부분 평걸평(兵訣評), 전략고(戰略考), 진련제(陣練制), 군자승(軍資乘), 점도재(占度載) 등으로 되어있다. 특히, 군자승 권110 성제(城制, 성을 운영하는 제도)에는 당시 첨단의 성곽시설로 옹성, 적대, 노대, 현안, 중문대루, 오성지, 공심돈의 제도가 설명되어 있다. 이 방대하고 위대한 무비지는 명나라(1368~1644)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청나라시기에도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널리 쓰이질 못했다. 그러나 무비지는 바다 건너 한반도의 수원화성을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출처 : 경기신문(http://www.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