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를 찾아서>(4)안면도 솔숲-쭉뻗은 美松, 수원성 대들보로 사용

2019. 4. 6. 16:15한국사

천년 소나무 왕국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하나 관심 가

져주는 이 없어도 씩씩한 기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궁

궐의 대들보로, 군함의 조선재로 제몫을 다했던 영광의 세월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천년 왕국을 지키고 선 안면도의 소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렀다. 중부 서해안 지방에서 가장 혈통 좋은 소나

무들이 살고 있는 곳. 단 한가지 수종, 소나무를 500여년 동안 지속

적으로 보호해온 조선왕조의 철저한 노력이 숨쉬는 곳. 안면도

솔숲을 설명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이다

.

안면도 솔숲의 이런 명성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

명성은 1000년 전의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 지리서나 문물제도를 정리한 ‘증

보문헌비고’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책에는 “

고려조부터 안면곶에서 재목을 길러 궁실 건축용과 선박제조용

목재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안면도는 삼남지방의 세곡

(稅穀) 운반을 보다 쉽게 하려고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뚫어 1713년 마침내 바닷길로 연결되면서 육지가

섬으로 변했다.

안면도의 솔숲이 고려왕조에 이어 조선왕조까지 그 진가를 계속

발휘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13세기 몽고군의 산림약탈을 피해갈

수 있었던 행운도 한몫을 했다. 기록에는 변산반도와 나주의 천

관산, 제주의 산림들이 일본징벌용 선박 제조에 무참히 베어질

때, 안면곶의 솔숲은 도끼 날을 피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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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소나무에 대한 조선왕조의 이용사례는 ‘화성성역의궤’

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200여년 전인 1794년에 착

공해 1796년에 완공된 수원 화성의 축조경위와 건설 내용이 수록

된 이 의궤에는 다른 건설자재와 마찬가지로 사용된 목재의 내용

도 자세히 수록돼 있다. 화성건설에 사용된 목재는 원목 9680주,

판재 2300립, 서까래용 원목 1만4212주로 안면도, 장산곶, 강원

도 관동, 전라좌·우수영에서 조달됐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목재는 이들 원목 중에서 기둥이나 대들보로

사용된 대부등(大不等)이다. 대부등은 길이 9m, 줄기쪽 직경 67

㎝로 매우 큰 아름드리의 굵은 목재를 말한다. 나무높이 25m,

슴둘레직경 80㎝나 되는 거대한 소나무를 잘라야 대부등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나무가 사용됐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의궤에는 수원성 축조에 원목 하나의 부피가 4㎥에 달하는 대부

등 344주를 사용했으며, 이들은 모두 안면도에서 조달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년 전 안면도 솔숲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기록

이다. 아름드리 굵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그 당시의 안

면도를 상상하면 천년 소나무 왕국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을지 더

욱 궁금해진다.

고려와 조선왕조가 이 땅의 수많은 소나무 산지 중에 유독 안면

도의 소나무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임업연구원의 배재수 박

사는 수운(水運)의 편리함, 벌채하기 좋은 지세 그리고 소나무

생육에 좋은 환경을 꼽기도 한다.

하나의 무게가 1t이 넘는 대부등과 같은 무거운 물자를 수송하는

데는 육로보다는 강이나 바다의 물길이 훨씬 편리했다. 안면도

는 최대 목재 수요처인 개경이나 한양과는 물길로 가까웠다.

또 섬 전체의 지형이 구릉지인 안면도는 나무를 베고 운반하기가

용이하며, 벌채된 목재는 물길을 이용하여 즉시 운반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 좋은 소나무들이 안면도

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런 이점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천년 세월동안 안면도를 소나무 국용재(國用材)의 주요 생산기지

로 활용했던 셈이다.

안면도의 소나무는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처럼

곧고 쭉쭉 뻗은 모습인데 비해 천수만 건너 홍성지방의 소나무는

대체로 굽고 왜소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

도 왜 이런 형태적 차이가 나타날까?

조선왕조는 산림황폐로 결딴이 난 고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개국과 더불어 강력한 산림보호시책을 실시한다. 또 국용재인

소나무를 원활하게 충당하고자 소나무 벌채를 엄격히 금지한 송

금(松禁)정책도 폈다. 조선왕조가 안면곶을 의송지지(宜松之地)

로 지정하고 수군이 직접 관리하도록 했던 송금정책은 1485년에

펴낸 ‘경국대전’에도 반영돼 있다.

‘경국대전’ 식재조(植栽條)에는 “안면곶과 변산반도는 해운판

관이, 해도(海島)는 만호(萬戶)가 자세히 살피고”, “해마다 봄

에 어린 소나무를 심거나 혹은 종자를 심어서 기르고, 연말에 심

은 숫자를 왕에게 보고한다. 어긴 자는 산지기는 장(杖) 80, 당

해관원은 장 60에 처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안면도의 소나무가

우량한 형질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지난 수

백 년의 세월동안 꾸준히 가꾸고 지킨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성이 없었던 인접한 서해안 솔숲은 점차 훼손되어 불량해

질 수밖에 없었다.

안면도의 소나무가 인접한 충청도 지역에서 자라는 소나무보다

특히 뛰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은 또 있다. 조선왕조는 전

국에 걸쳐 282처의 봉산(封山)을 지정했다. 그 중에 충청도의 봉

산 73개 처는 모두 안면도에 표시되어 있음을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인 ‘동여도’로 알 수 있다. 섬 하나에 전국 봉산의 4분의

1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국용재 생산기지로서 안면도를 중시했던

조선왕조의 의지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소나무를

생산하고자 철저하게 관리하고 보호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이 땅 최상의 국용재 생산기지란 명

예를 누렸던 안면도의 솔숲은 조선의 몰락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일제는 안면도 솔숲을 일본인에게 불하하여 조선 제일

의 국용재 생산기지를 결딴내는 데 일조했다. 더 안타까운 사실

은 해방 이후에도 안면도 솔숲에 대한 훼손행위가 계속된 점이다

.

정상배들에 의한 약탈식 벌채, 목야지(牧野地) 조성을 위한 대부

, 충청남도로의 관리권 이양 등은 천년 동안 국가가 관리해 왔던

안면도 솔숲의 의미를 간과한 정부의 근시안적 산림시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1988년 정부가 115㏊에 달하는 안면도

솔숲을 유전자 보전림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점이다.

/글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ychun@kookmi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