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왕은 용변조차 어의에게 맛보여야 했다

2019. 4. 10. 11:06한국사

사생활? 왕은 용변조차 어의에게 맛보여야 했다

기사입력2010.07.05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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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9대 숙종 임금의 후궁인 최 숙빈의 삶을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 6월 29일 30부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한성으로 귀환한 동이(한효주 분)가 숙종 임금(지진희 분)과 심야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런 장면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방영된 바 있다. 장 희빈(이소연 분) 측의 박해를 피해 한성 밖으로 피신하기 전에도 동이는 임금과 여러 차례 술자리를 가졌다. 어떤 때는 돼지 껍데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 적도 있다. 이들의 데이트는 궐 밖에서 뿐만 아니라 궐 안에서도 수시로 이루어졌다. 한적한 밤에 동이가 바람을 쐬러 나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선가 숙종이 나타나서 이내 둘 만의 자리가 만들어지곤 했다.

비단 <동이>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극에서 왕과 궁녀의 데이트를 다룬 장면들이 자주 묘사되었기 때문에, 많은 남자들의 인식 속에는 '왕이 되면, 수많은 궁녀들을 마음대로 거느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관념이 존재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남자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는 여러 개의 '로망'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왕이 되면 여자들을 마음대로 사귈 수 없었다고 해야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가늠하기 위해, 조선시대 국왕의 일상이 얼마나 철저히 통제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조선시대에는 특히 더욱 더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다. 오늘날의 스타급 연예인 이상으로 왕의 일상은 있는 그대로 세상에 노출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사례①] 왕의 일상은 항상 체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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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거동이 항시 '관찰 대상'이었다는 점은 <승정원일기>에서 잘 드러난다. <승정원일기>란 국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매일 작성한 근무 일지로, 조선시대 최고 기밀문서에 해당한다. 2001년 9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 <승정원일기>에서 가장 큰 관심 대상 중 하나는 '오늘 왕이 어디 있었는가?'하는 점이었다. 이 점은 매일 매일의 <승정원일기>에서 왕의 현재 위치가 반드시 기록된 데에서 잘 드러난다.

드라마 <동이>의 현재 방영분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숙종 19년(1693)의 <승정원일기>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숙종 19년 6월 3일 즉 서기 1693년 7월 5일자 <승정원일기>에는 "날씨 맑음. 주상께서 (오늘은) 창덕궁에 계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움직일 때마다 측근들이 항상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왕의 동선(動線)이 위와 같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왕이 주변을 따돌리고 궁녀를 몰래 만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개중에는 예외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에 불과했다.

[사례②]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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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주인은 왕이라고 하지만, 궁 안에는 왕이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궁궐에서 왕이 거처하는 3대 공간으로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이 있었다. 이 어디에서도 왕은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편전은 왕이 정무를 처리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의례를 거행하는 곳이었다. 정전은 조회 등을 거행하는 곳으로서 편전보다 훨씬 더 의례적인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공간들에서는 왕의 사생활이란 게 존재할 수 없었다.

'잠자는 곳'이란 의미의 침전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지만, 여기서도 왕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조선왕조 하에서, 왕은 홀로 있는 공간에서도 신독(愼獨)이란 성리학적 가치를 준수해야 했다. 특히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반드시 삼가야(愼) 한다"는 <대학>의 가치관이 임금에게 강제되었다. 홀로 있는 동안에도 도덕적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잔소리'가 항상 왕의 귓가를 맴돌았던 것이다.

일왕(소위 '천황')을 신으로 간주하던 1946년 1월 1일 이전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임금도 불완전한 인간'이란 전제 하에 임금에게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할 것을 강요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뭇 백성을 통치할 자격이 생긴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침전 같은 공간에서도 왕은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침전 안이라고 해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다리 쭉 뻗고 앉아서 여자 이야기만 한다면, 그런 모습이 내시나 상궁들의 입을 통해 조정에까지 소문나고 그렇게 되면 국왕의 이미지에 흠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그런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사생활이란 것을 포기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왕에게 사생활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사례③] 왕은 용변마저 편하게 볼 수 없었다

비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여러 모로 편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비서가 화장실 내부의 '1인용 공간'에까지 따라 들어와서 용변 보는 일을 관찰하고 '용변의 결과물'까지 병에 담는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실제로 그런다면, 아마 화장실 가는 일이 무섭기까지 할 것이다.

왕들은 그런 생활을 했다. 내시(환관)들이 일종의 요강인 '매우틀'을 갖고 다니며 왕의 용변 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왕의 배설물을 '매우'라고 하고, 한자로는 '梅花'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을 담는 용기를 매우틀이라고 했다. 매우틀에 보관된 왕의 배설물은 궁중 의사들의 혀끝으로 옮겨졌다. 왕의 몸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 싶어서 의사들이 그 맛을 보았던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웬만한 왕들은 용변 보는 일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예민한 왕들은 음식 먹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식사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배설물에서 풍길 냄새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남몰래 궁녀를 만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단 한 순간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지 않았을까? 그런 와중에도 최 숙빈·장 희빈 같은 궁녀 출신 여인들을 사귄 숙종 임금은 좀 특이한 편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례④] 왕은 사방의 감시 속에 '잠자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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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그 문을 지나면 근정전이라는 정전(正殿)이 나온다. 근정전 뒤에 사정전이라는 편전(便殿)이 있다. 바로 그 뒤에 있는 것이 침전(寢殿) 영역이다. 이곳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 교태전은 왕후의 침전이다.

그중에서 강녕전의 내부구조를 들여다보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방들을 보노라면, 가운데에 있는 방 하나가 다른 방들에 의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있는 방은 왕이 잠을 자는 곳이다. 여기서 왕은 여인과 밤을 보냈다. 그리고 주변의 방들에서는 상궁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그 상궁들은 왕이 여인과 잠자리를 가질 때에 자신의 신경을 왕과 여인에게 집중시켜야 했다. 엿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왕이 너무 오래 한다 싶으면, 이들이 나서서 "옥체를 생각하시어 그만 하시지요!" 등등의 말로 왕의 쾌락을 중지시키곤 했다. 가장 사적이어야 할 공간에서마저 왕은 철저히 감시를 받았던 것이다.

배우들에게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베드신 촬영이라고 한다. 몇 명의 스태프만이 지켜보는 제한된 공간에서 촬영되는 베드신도 배우들에게는 엄청난 심적 부담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왕에게는 그런 생활이 매일 같이 계속되었다. 사방의 방들에서 상궁들이 관찰을 하고 그들이 언제 뛰어 들어와 "NG!" 혹은 "컷!"을 외칠지 몰랐으니, 왕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겪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궁녀와의 남몰래 데이트, 사실상 불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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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선의 왕들에게 있어서 사생활이란 그야말로 사치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공적인 공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적인 공간에서도 그들은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일일이 기록되고 감시되었으니, 예쁜 궁녀를 헌팅한다거나 궁녀와 남몰래 데이트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예쁜 궁녀들을 찾아내 데이트를 즐긴 왕들이 있었다. 숙종은 궁녀들 속에서 장 희빈과 최 숙빈 같은 여인들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에 불과했다. 그것이 힘든 일이기에, 그런 일을 해낸 숙종 같은 임금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수 있는 것이다. 궐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그가 장 희빈·최 숙빈 등을 만난 일이 결코 화젯거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남자들의 심리 속에는 '나도 한번 왕처럼 살아보았으면!'하는 바람이 잠재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의 왕들은 실제로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아마 왕들은 '나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평범한 남자처럼 살아보았으면!'하고 희망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왕이 되면 처와 첩을 여러 명 둘 수 있지 않았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조선왕조에서 왕의 일부다처를 허용한 것은 왕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왕자의 생산을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후자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엄격히 관리되고 통제되었다. 이런 데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마음에 드는 궁녀와 수시로 데이트를 즐기는 드라마 속의 왕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밤중에 궐을 몰래 빠져나와 길거리 주점에서 궁녀와 한담을 나누며 돼지 껍데기를 씹을 수 있는 여유. 그런 여유를 즐겨 보려면, 왕이 되기보다는 연예인이 되는 게 정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