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rl Harbor in ‘진주만’…전쟁과 사탕수수의 역사, 태평양의 진주 하와이

2020. 2. 18. 10:52강의/진주만

진주만 공습을 다룬 영화가 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1년 작 ‘진주만(Pearl Harbor)’이다. 영화는 진주만에 주둔하는 미 육군 비행 조종사 레이프와 대니 그리고 에블린 간의 우정과 사랑과 진주만 공습을 담았다. 특히 영화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둘리틀 폭격대’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하와이 진주만, 미국의 태평양 전진 기지

하와이는 태평양의 배꼽 위치에 있다. 미국 본토에서 무려 3700㎞나 떨어져 있지만 하와이는 미국 본토와 같다. 미국의 50번째 주이자 관광, 자원 그리고 군사 기지로서 하와이는 보석 같은 존재다. 하와이, 마우이, 오아후, 카우아이, 몰로카이 등과 크고 작은 10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하와이는 군도다. 하와이라는 이름은 약 2000년 전 카누를 타고 이곳에 정착한 폴리네시아인들이 그들의 추장인 ‘하와이 로아’의 이름을 따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전설 속 ‘하와이키’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와이는 폴리네시아인들의 왕국이었다. 각 섬마다, 각 부족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권력을 정하고 먹을 것을 분배했다. 그 하와이에 중앙 집권제 통치가 도입된 것은 부족장 중 카메하메하가 10년간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전쟁에서 승리한 1795년 무렵이다. 이후 카메하메하 후손들이 하와이 왕국을 지배했다.

하와이가 유럽에 처음 알려진 기록은 18세기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해서다. 물론 그 전에도 용감하고 모험심 강한 탐험가들이 하와이를 찾았지만 제임스 쿡은 하와이 왕국은 물론이고 이곳의 원주민들과 교류를 시도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그는 1778년 약탈을 시도한 자신의 부하들과 원주민 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중재자로 나섰지만 원주민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하와이를 찾았지만 가장 밀접한 관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미국이었다. 미국은 19세기에 이미 수백 척 어선이 하와이를 방문, 식수와 물자를 공급받았다. 상업적인 관점에서 하와이를 관리하던 미국은 1842년 하와이 왕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 이후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재배가 이루어지며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주가 시작됐다. 이 수확물은 대부분 샌프란시스코로 공급되었다. 무역 수입을 보장받은 칼리카우아 왕은 그 대가로 1887년 하와이 진주만을 미국이 해군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보장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태평양 진출이 가속화되었다.

진주만은 하와이의 주도이자 제일 큰 도시인 호놀룰루에서 10㎞ 서쪽에 위치한 클로버 모양의 항구다. 이곳엔 진주를 품은 조개들이 자라 하와이 원주민들은 ‘와이모미, 즉 진주 바다’라고 불렀다. 1840년 미 해군 찰스 윌크스가 처음 측량하면서 군사 항구로서의 가치를 알아보았으며, 이후 스코필드 대령이 진주만의 항만 권리를 미국이 가져야 한다고 미 정부에 건의했다.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벌어진 1898년 무렵 진주만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 교두보로서 그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1908년 미국은 이곳에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

진주만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전쟁’ 때문이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당시 미국의 주력 전함인 애리조나호가 침몰되었고 병사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공습으로 미국은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4년간 태평양에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5년 종전 후에도 진주만은 미국의 태평양 전략의 핵심 기지였다. 태평양을 관할하는 제7함대의 기항지로 해군 정박지, 조선소, 보급소, 유류 저장 시설, 공군 기지 등이 설치되어 있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2001년 작 ‘진주만’은 진주만 공습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픽션으로 진주만에 주둔하는 미 육군 비행 조종사 레이프와 대니, 그리고 간호사 에블린 간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진주만 공습을 다룬다. 특히 영화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함께 역사적 사실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둘리틀 폭격대’ 이야기를 정면으로 꺼냈다. 둘리틀 폭격대는 진주만 공습 이후 사기가 떨어진 미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일본 본토를 공습한 작전이다. 미국은 수개월의 준비 끝에 진주만 공습 4개월 후인 1942년 4월18일 총 17대의 육상 폭격기 B-25를 동원해 일본의 도쿄, 나고야 등을 공습했다.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폭격대’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만 할 수 있었고 항공모함 역시 폭격대 이륙 후 진주만으로 귀환해 임무를 마친 폭격대는 중국에 착륙하는 계획이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14대의 폭격기가 중국에 도착해 비상 착륙이나 낙하산을 통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총 80명의 둘리틀 폭격대 중 11명은 작전 중 전사하고 몇 명은 일본군에게 잡혀 총살 당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민은 둘리틀 폭격대를 거국적으로 환영했다. 이들의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동은 미국민의 애국심을 북돋았고 일본에게는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 아닌가?’라는 자각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레이프와 대니, 에블린의 우정과 사랑

레이프 맥컬리(벤 애플렉)와 대니 워커(조쉬 하트넷)는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다. 비행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은 같이 육군에 입대한다. 육군 중에서도 항공대 조종사가 두 사람의 목적이자 꿈이다. 신체 검사장. 레이프는 대니의 도움을 받아 시력 검사표를 통째로 외운다. 사실 레이프는 난독증이라 글자를 외우지 못했다. 드디어 레이프 차례가 되었다. 레이프는 외운 대로 했지만 그의 행동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해군 간호사 에블린 존슨(케이트 베킨세일)은 레이프를 유심히 살핀다. 그리고 말한다.

“시력 검사 4번, 하단 말고 상단, 양 눈으로 읽으세요.”

“음~ X, E…” 에블린은 레이프를 바라본다. 그 순간 레이프는 에블린에게 간청한다.

“문제가 있는 것 잘 압니다. 가끔 난독증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 중에 독서할 일은 없잖아요. 부디, 내 날개를 꺾지 마세요.”

에블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합격 도장을 찍는다. 레이프의 열정이 결국 그로 하여금조종사가 되게 했고, 에블린과 사귀는 기회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레이프와 대니는 중위가 되어 하와이 주둔 미 육군 항공대 조종사로 배치받는다. 에블린 역시 하와이 야전 병원에 근무 중이다. 훈련의 반복. 하지만 레이프와 대니는 이 비행단의 요주의 인물로 등장한다. 젊은 혈기에 모험심 많은 두 사람은 하와이의 평화로운 분위기, 반복된 훈련에 심심함이 폭발할 지경.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과 담력을 뽐내는 곡예 비행을 일삼는다. 서로 어디로 피할지 미리 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마주보고 달리면서 부딪치기 바로 직전에야 방향을 틀어 피하는 비행을 감행한다.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조종간을 움직이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 상관에게 심하게 혼난 두 사람. 하지만 이 정도에 풀이 죽을 그들이 아니다.

어느 날, 레이프는 대니에게 전쟁이 한창인 영국 공군에 지원했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공격에 유럽은 풍전등화의 처지. 오직 영국만이 미국의 도움으로 근근이 히틀러를 막아 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레이프는 대니에게 “혹시 내가 영국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에블린을 부탁할게”라고 말한다. 레이프는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은 전투기는 물론이고 조종사도 부족한 상황으로 그는 독일군 폭격기 요격 임무를 맡는다.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레이프는 전투기에 오른다. 비행기 동체엔 독일 전투기의 기관총알 구멍이 뚫려 있고 조종석에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옆의 동료가 말한다. “이 전투기를 몰던 조종사는 바로 전에 죽었어.”

레이프는 출격한다. 독일군 전투기가 눈에 들어온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프는 독일군 전투기의 꼬리를 물고 기관총을 퍼붓는다. 이윽고 독일군 전투기가 추락한다. 그 순간 레이프의 전투기에도 총알이 날아든다. 독일 전투기는 레이프 후미에서 집요하게 추격한다. 레이프는 곡예 비행으로 피하려 했지만 이내 총알 세례를 받고 격추된다. 비상 탈출을 시도하는 레이프. 하지만 캐노피가 열리지 않는다. 레이프의 전투기는 이내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바다에 가라앉는 비행기. 레이프는 조종석 유리를 깨고 탈출한다. 하지만 망망대해다. 레이프가 점점 의식을 잃어 가는 순간, 어선 한 척이 다가온다. 프랑스 어선이다. 레이프는 극적으로 구조된다. 그러나 구조 수색에 나섰으나 실패한 영국 공군은 레이프가 전사했다고 단정하고 이를 미군에게 통보한다.

레이프의 전사 통지서를 받은 대니. 그는 깊은 슬픔과 고민에 휩싸인다. 대니는 에블린에게 레이프가 전사했다고 전한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에블린. 대니는 에블린을 안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연다. 레이프를 중심으로 한 명은 친구, 한 명은 연인. 처음 두 사람의 대화 주인공은 레이프였지만 점차 두 사람의 이야기로 바뀌어 간다. 어느덧 연인이 된 대니와 에블린. 하지만 두 사람에게 매우 기쁘면서도 당황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레이프가 살아서 돌아온 것.

에블린은 레이프에게 그동안 대니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레이프,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나는 대니와 연인이 되었어.” 에블린의 말에 충격을 받은 레이프는 술집으로 향한다. 대니는 레이프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주먹을 휘두르고 술집은 난장판이 된다. 헌병대가 출동하자 두 사람은 급히 차를 타고 술집을 빠져나간다. 해변에 도착한 두 사람. 다시 주먹을 주고 받다가 차에서 잠이 들고 만다. 이때가 1941년 12월6일, 늦은 밤이다.

일본, ‘잠자는 사자, 미국’을 깨우다

당시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독일이 전 유럽을 집어삼키고 영국과 소련을 노리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국, 대만을 손에 넣고 호시탐탐 원유와 자원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유럽 전선 참전을 준비 중이었고 일본에 대해서는 조금은 낙관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이 자신들의 원유 루트를 차단하자 미국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 목표는 바로 진주만이었다.

일본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을 돌파할 어뢰를 개발했고 야마모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의 주력 부대가 비밀리에 하와이로 항해 중이었다.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함 30여 척과 전투기 360대의 대규모 부대가 유령처럼 하와이로 진군했다. 일본 해군의 목적은 진주만을 기습해 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과 전함, 그리고 비행 기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7일 일요일. 전날 입항한 미군 군함들은 진주만에 모두 정박해 있었다. 군인들은 달콤하고 나른한 주말을 즐기고,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때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들이 미군 전함과 공군 기지, 해군 병참 기지는 물론 야전 병원까지 일제히 폭격했다. 수많은 군인이 쓰러지고 거대 전함 애리조나호가 두 동강 난 채로 1000여 명의 수병과 함께 물속으로 침몰했다. 에블린이 일하는 병원도 마찬가지다. 폭탄이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난무한 가운데 에블린은 한 명의 군인이라도 살리기 위해 애를 태운다. 술에 취해 차에서 잠이 든 레이프와 대니. 두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 투덜거린다. “아니, 일요일인데 뭔 훈련을 이렇게 요란하게 하지?” 하지만 이들의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하와이의 모든 군사기지가 불에 타고, 바로 그들의 머리 위로 일본 전투기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일본군의 기습임을 알고 공군 기지로 달려간다. 부서지는 전투기와 쓰러지는 병사들. 두 사람은 겨우 전투기를 이륙시켜 일본 전투기 몇 대를 격추시키지만 역부족이다. 폭격은 끝나고, 아름다운 진주만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시체는 즐비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다.

레이프와 대니는 둘리틀 비행대에 자원한다. 둘리틀 비행대는 일본 본토를 폭격할 비밀 임무를 준비 중이다. 두 사람은 무거운 육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이륙시키는 훈련에 집중한다. 수십 번의 훈련 끝에 이륙에 성공한 폭격대는 항공모함을 타고 일본으로 접근한다. 원래 계획은 일본 본토 640㎞ 거리에서 이륙. 하지만 일본 감시선이 항공모함을 일찍 발견하는 바람에 부득이 1000㎞ 거리에서 이륙한다.

레이프와 대니는 각자 폭격기를 몰고 일본 공습에 나선다. 목표는 도쿄, 고베, 나고야 등이다. 폭격에 성공한 두 사람은 중국으로 기수를 돌린다. 착륙 지점은 장개석 군이 장악하고 있는 비행장. 하지만 일본군의 대공포화에 맞은 두 사람의 폭격기는 목표 비행장이 아닌 다른 곳에 불시착한다. 그곳은 일본군 점령지다. 두 사람은 일본군에 포위되지만 총격전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대니가 총에 맞았다. 부상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대니는 레이프에게 말한다. “레이프, 이번에는 내가 부탁할게. 에블린을.” 레이프는 그동안 비밀로 간직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대니, 웃기지 마. 정신 차려. 너는 곧 아빠가 될 거야. 에블린이 네 아이를 임신했어.” 대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프의 손을 잡는다. “레이프, 네가 나 대신 좋은 아빠가 되어 줘.” 결국 대니는 숨을 거둔다. 하와이 공군 비행장. 에블린은 비행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둘리틀 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레이프가 보인다. 에블린은 환호한다. 뒤를 이어 관이 내려진다. 에블린은 그 관의 주인공이 대니임을 알고 눈물을 흘린다. 울고 있는 에블린에게 레이프가 다가간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싼다.

▶일본의 기습 공격, 진주만의 비극

영화에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공식, 즉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은근한 ‘국뽕’ 느낌이 있다. 물론 블록버스터의 의도대로 흥행에 성공했지만 영화는 대규모 전쟁 신 이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는 두 가지 역사적 팩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기습적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한 이른바 ‘둘리틀 작전’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다. 일본은 개항 이후 해외 진출을 목표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원유는 필수 조건이었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천왕을 중심으로 군부가 실질 권력을 장악하는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호기였다. 세계의 모든 이목, 특히 미국의 관심이 유럽에 집중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 진출을 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와 싸우느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방어할 여력이 없었다. 오로지 미국만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을 견제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동남아시아를 점령해 원유와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미국과의 일전을 각오한 것이다.

일본은 선제 대응을 모색했다. 거인 미국과의 정면 대결은 당시 일본 군부에게도 부담스러웠다. 일본 군부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과 방어의 핵인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면 아무리 미국이라도 이를 만회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틈에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설사 미국이 군사력을 회복해도 협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으려는 속셈이었다. 육군 원수 출신의 도오조오 히데키 일본 수상은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전략을 신뢰하고 그에게 진주만 공습의 전권을 부여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일본 함대가 진주만으로 진격해 항공모함으로 운송한 대규모 전투기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이미 하와이에 거점을 마련한 첩보원을 통해 미국 함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함대는 토요일에 귀항해 군함을 정비하고 수병들은 일요일까지 휴가를 즐긴다는 사실을. 반면 미국은 일본의 기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미국에게는 태평양의 일본보다 풍전등화의 영국을 돕는 것이 우선이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1941년 11월7일, 일요일 새벽을 디데이로 결정했지만 최종적으로는 12월7일로 공격일을 결정했다. 일본 함대는 하나둘 항구를 빠져나가 쿠릴 열도 부근의 히도카푸만에 집결했다.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그리고 급유선 8척 등 총 31척이었다. 또한 각 항공모함에 탑재된 전투기는 총 360대로 일본군 전력의 최정예 부대가 대거 이 작전에 참여했다. 그들의 목표는 미국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전함 8척, 순양함 16척, 구축함과 잠수함 그리고 하와이의 6개 미국 공군기지였다. 야마모토 제독은 공격 함대를 이끄는 나구모 제독에게 공격 승인 암호문을 발송했다. 암호문은 ‘니타카 산에 등반하라’였다.

12월7일,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함과 항만, 공군 기지는 모두 파괴되었고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고 도쿄 본영으로 무전을 쳤다. 바로 유명한 ‘도라 도라 도라’다. 이 뜻은 돌격의 일본식 발음인 ‘토츠케키’와 진주만 공습 주력기인 뇌격기를 뜻하는 ‘라이게키’의 합성어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은 100% 성공한 작전이 아니었다. 후에 역사가들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진주만에서 벗어난 지역에 정박해 공습을 피한 것’과 엄청난 양의 석유가 저장된 ‘원유 탱크’가 폭격 대상에서 벗어난 것, 이 두 가지 사실이 미국 해군의 빠른 회복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가정이지만 일본군이 항공모함과 원유 탱크마저 폭파했다면 결국은 미국이 승리하더라도 전쟁 시간은 더 연장되었을 것이다.

미 국민에게는 용기를, 일본에게는 공포를 진주만 공습은 단순히 미 해군이 공격 당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본토 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과의 전쟁은 드넓은 태평양에서의 전투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이 받은 충격은 컸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국민의 사기를 올리고 일본에 공포를 심어 줄 ‘한 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일본 본토 공습이라는 상식을 초월한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둘리틀 작전’이다.

1 1941년 12월7일 일본군에 피격 당해 화염에 휩싸인 미국 전함 애리조나호
2 1941년 12월7일 최초 공격 당시 일본 비행기에서 촬영한 진주만 사진
3 1942년 4월18일 도쿄를 향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B-25 폭격기
4 항공모함을 빼곡히 채우고 출격을 준비하는 미 폭격기들
5 둘리틀 비행대,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제임스 둘리틀 중령
6 일본과의 전쟁 선언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대통령
그 시작은 진주만 공습 2주 뒤인 1941년 12월21일, 백악관 회의에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 본토 공습을 지시했다. 하지만 군 전략가들은 난색을 표했다. 본토 공습에는 항공모함이 동원되어야 했는데 일본 본토에 접근하는 순간 일본 해군과 공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에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낸 이가 있었다. 해군 본부 참모 프랜시스 로 대령이다. 그는 비행 거리가 항공모함 탑재기에 비해 훨씬 긴 육군 쌍발폭격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즉 항공모함 탑재기는 본토에서 400㎞ 이내에서 이륙해야 하지만 쌍발폭격기라면 600㎞에서 이륙해도 일본 본토 공습이 가능했다.

작전이 결정되자 폭격대 선발, 훈련 등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폭격대 대장에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임명되었다. 그는 유명한 항공 조종사이자 MIT 항공 공학 박사 학위 소지자. 둘리틀 중령은 항속 거리가 긴 대신 이륙 거리가 제일 짧은 B-25을 폭격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존 폭격대 중 가장 노련하고 우수한 17폭격단을 둘리틀 폭격대에 편입시켰다. 이후 이 비행대를 ‘도쿄 공습대’ 혹은 ‘둘리틀 비행대’로 불렀다.

하지만 난제가 있었다. 바로 무거운 B-25

의 무게였다. 둘리틀 중령은 이륙 훈련을 위해 폭격대를 버지니아주 노포크 공군 기지로 옮겨 수많은 훈련을 실시했다. 항공모함에서의 이륙 시 활주로 길이는 최장 139m. 이륙에 성공하기 위해 항법 장치, 식수통은 물론이고 폭격기의 유일한 방어 수단인 후미의 기관총도 떼어 내고 대신 검게 칠한 막대기를 달았다. 그렇게 몇 달의 훈련 끝에 비행대는 항공모함에 승선해 일본으로 향했다.

작전은 일본 본토 600㎞ 지점까지 접근해 도쿄, 요코스카, 나고야, 고베 등을 폭격하고 중국 본토로 날아가 그곳 비행장에 착륙하는 것. 중국은 당시 장개석 총통의 지배지와 일본군 점령지로 나뉘어 있었는데 둘리틀 폭격대의 최종 목적지는 장개석 군이 장악한 절강성 공군 기지였다. 여기에는 단서가 있었다. 일본 본토 접근 시 일본 감시선과 정찰기에 발각되면 그 즉시 이륙하는 것이었다.

1942년 4월18일, 둘리틀 폭격대는 항공모함 호넷을 타고 진군했다. 둘리틀 중령은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항공모함에서 폭격대의 최종 목표를 발표했다. 폭격대 이륙 후 항공모함은 즉시 진주만으로 되돌아가고, 폭격기는 임무 수행 후 중국에 착륙한다고 알렸다. 사실 죽음을 각오한 무모한 작전이었다. 이 기동 함대의 사령관 홀지 제독은 일본군 감시선을 침몰시키고 난 후 바로 둘리틀 폭격대 출격을 명령했다. 일본 본토와의 거리는 약 1000㎞로 예상보다 긴 비행을 각오해야 했다. 17대의 폭격기는 이륙했고 당시 이 장면을 유명한 영화감독 존 포드가 화면에 담았다. 폭격기는 6시간 비행 끝에 도쿄에 도착했다. 첫 폭격은 둘리틀 중령의 폭격기였다. 이어 다른 폭격기들의 공습이 시작되자 일본은 그야말로 혼돈에 빠졌다. 폭격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일본 본토가 공습 당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 공포심을 안겨 주기에는 충분했다.

폭격대는 각기 중국으로 향했다. 비행 시간은 약 12시간. 한 대는 연료 부족을 감지하고 1차 폭격 후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기수를 돌렸고, 윌리엄 파로우 중위 폭격기는 대공포화에 격추되어 포로로 잡혔다. 후에 윌리엄 중위는 민간인 공격 죄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연료가 거의 고갈될 무렵 비행기는 절강성에 도착했지만 미군기를 유도하기 위해 불을 켜기로 한 중국군은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둘리틀 폭격대를 일본 전투기로 오인해 비행장의 모든 유도등을 껐다. 폭격대는 착륙 지점을 잃어버리고 각기 육지로 해상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하거나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중국군과 조우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 희생도 있었다. 둘리틀 폭격대 총 80명 중 69명만이 미국으로 돌아갔고 11명은 전사했다.

미국은 이들의 작전 성공에 환호했다. 진주만을 기습 당하고 모든 전선에서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는 뉴스만 접하던 미국민들은 일본 본토를 공습해 진주만의 복수를 한 둘리틀 폭격대의 활약에 희망을 얻었다. 국민과 군인들의 사기 역시 올라갔다. 이 작전의 최고 지휘자인 루스벨트 대통령은 둘리틀 중령에게 최고 무공훈장, 다른 모든 대원들에게도 훈장을 수여했다. 특히 둘리틀 중령은 준장으로 2계급 승진 했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위키피디아, Daum영화, 픽사베이, 포토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