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책을 많이 읽기보다 깊이 있게”…‘깨달아 실천하는 독서법’ 강조

2019. 12. 24. 11:13강의/공부법

“책을 많이만 읽으려 할 게 아니라 전일하고 치밀하게(專精) 읽어야 한다. 신기한 것을 보려 애쓸 게 아니라 평상적인 것(平常)을 보아야 한다.”

조선 후기의 국왕 정조만큼 책을 많이 쓴 임금도 없을 것이다. “조선의 최대 저술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최남선은 “정약용의 여유당집(與猶堂集) 500권,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정조의 홍재전서(弘齋全書) 184권, 서명응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수백 권, 성해응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150권 등이 있다. 그 최대한의 것으로는 최한기의 명남루집(明南樓集) 1000권이니 아마도 이것이 우리나라(震域) 저술상 최고 기록”이라고 대답했다.(최남선, 조선상식문답 속편)

정조는 ‘조선에서 다섯 번째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람인 셈인데, 그런 그가 중시하는 독서법은 ‘많이’가 아니라 ‘깊이’이다. 책을 전일하고 치밀하게 읽다 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豁處)이 있는데, 그곳은 새것을 읽는 데서가 아니라 새롭게 읽는 데서 발견된다고 정조는 말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대한 해석이 그 예다. 즉위 초년의 경연 대화에서 정조는 온고지신을 “옛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신하에게 “그렇지 않다”고 반론했다. “초학자(初學者)는 그렇게 보는 수가 많은데, 대개 옛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맛을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더욱 잘 알게 되는 게 그 깊은 의미”라고 말했다.

온고(溫故)의 과정, 다시 말해 이미 읽은 것 또는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다시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비로소 보는 안목, 즉 지적 능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지신(知新)의 의미를 새것이 아니라 새롭게 깨닫는 공부법으로 보는 그의 통찰이 놀랍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정조의 온고지신 해석 중 재미있는 대목은 글 읽는 것을 맛으로 표현한 곳이다.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어가되 그 가운데서 새 맛(新味)을 발견하는 게 제일이라는 비유다. 그런데 새 맛은 먼 데서, 신기한 것에서 찾을 게 아니라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 여러 가지 시고 짠 반찬이 많아도 죽, 밥, 콩, 조 등의 본디 맛은 항상 변함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평상시에 먹는 음식, 즉 고전에 해당하는 책을 바꿀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읽을 때의 마음 자세인데, 본디 맛(本味)을 감사한 마음으로 새롭게 음미하며 거듭해서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수만 있으면 책 안의 오묘한(妙) 이치가 어느 순간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다가온다는 게 정조의 독서철학이다.

엄선된 몇 권을 깊이 읽고 곱씹어 읽는 것은 세종의 독서법이기도 했다. 세종은 당시 선비들이 아주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려 하기 때문에 얻는 바(所得)가 없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몇 권의 고전을 선별하여 정밀하고도 익숙하게 되읽는 ‘전경의 학습법(專經之學)’을 그는 추천했다. 좋은 책을 정밀하고도 익숙하게 되읽다 보면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그 안에서 실행할 것도 아울러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정조 역시 ‘실용에 도움되지 않는 글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실천을 강조했다.

나는 유명 인사들의 서재를 소개하는 신문 코너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그 빼곡한 책 중에서 과연 그분이 몇 권이나 정밀하고 익숙하게 읽었을까?

중요한 것은 그 책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실천했느냐가 아닐까. 좋은 책을 백 번 읽으면 현인(賢人)이 되고, 그중에서 한 가지를 실천하면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더욱 절실해지는 계절이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