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부국강병 꿈꾼 정약용...유배지서 '실학을' 완성하다

2019. 12. 24. 11:15강의/공부법

[경화사족의 삶과 문화] 새로운 나라를 꿈꾼 19세기의 지성, 정약용과 나주 정씨

     
▲ 치원총서 : 다산의 제자 황상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초록한 서적들. 다산학단의 공부법을 잘 보여주는 자료

새로운 나라를 꿈꾼 19세기의 지성, 정약용과 나주 정씨

김형섭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나주 정씨 가문의 내력>

다산 정약용의 집안인 나주 정씨 가문의 시조는 정윤종(丁允宗)이다. 가계 기록에 따르면 정윤종은 고려 유민으로서 조선왕조가 개국한 이래 황해도 배천 땅에 은거했던 인물로 지조를 지키고 덕을 쌓으며 집안을 일으키는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이후 이 집안에 벼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세조대 문과급제한 정자급(丁子伋)부터다. 정자급은 다산의 12대조이다. 정자급의 아들 수곤(壽崑)·수강(壽崗) 형제가 성종대 급제했고, 정호선·호관·호공·호서 4형제가 선조·광해군 때 급제했다. 정호선은 언벽을 낳았고 언벽은 시윤을 낳았고, 그 아들은 도복을 낳았는데, 대를 이어 모두 문과에 합격했다.

다산 정약용은 ‘9대 옥당’을 배출한 가문이라며 자부심이 컸다. ‘옥당(玉堂)’은 홍문관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시대 선비들은 홍문관에 들어가는 것을 평생의 소원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홍문관은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곳의 관원이 된다는 것은 학자로서 인정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앞날이 보장되는 청요직에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됐다.

그런 홍문관에 나주 정씨들이 9대에 걸쳐 연속으로 진출했다고 하니 이는 조선시대 양반 중에서도 특별한 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경기 일원에 기반을 마련해 갔던 나주 정씨는 숙종 년간 중앙정국에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정쟁이 치열해지던 시기 당화(黨禍)를 피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 그 한 파는 정시윤(丁時潤·1646~1713)을 입향조로 한 마재의 ‘두릉 정씨’이다.



<입향조 정시윤의 활동>

정시윤의 자는 자우(子雨), 호는 두호(斗湖)다. 어린 시절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인 사천 목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불우하게 보냈다. 그는 1669년(현종 10) 진사를 거쳐 1690년(숙종 16)에 문과에 급제했다.

정시윤이 관직에 나갔던 숙종 년간은 중앙 붕당간의 정쟁이 심화돼가던 시절이다.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예송 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정시윤의 외가는 숙종 년간 남인을 대표했던 목만선(睦藥善)며, 고무부는 오정일(吳挺一·1610~1670)이고, 누이는 민희(閔熙·1614~1687) 집안에 시집갔다.

이러한 인척 관계로 인해 정시윤은 남인의 주요한 인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고 남인 주요 세력들의 후원을 받았다.

정시윤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했을 때 문과를 거쳐 벼슬에 나갔다.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 대간의 직책을 역임했다.

관료시절 당론에 준절해 과격한 언론을 주장하기보다 공정한 자세로 임해 명망이 높았다.

숙종 19년 2월에 홍문록에 초선돼 남인계 청류(淸流)로 인정받았다. 그 뒤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을 때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발발하자 정시윤은 남인으로 지목돼 삭탈관직 되었다.

그리고 정국 변동의 여파가 가라앉기 시작했던 숙종 22년 소론계 부제학 오도일(吳道一)이 그의 서용을 청해 다시 관직에 나아갔고, 이후 세자시강원필선, 병조참의를 역임했고, 순천부사·길주목사를 지냈다.

     
▲ 다산초당 :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공부하던 초당의 모습

‘기근과 가뭄이 너무 참혹하여 백성들이 장차 다 죽게 되었고, 죽은 시체가 낭자함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인데, 목민관이 이를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도를 안찰하는 신하도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실상을 숨기고 있다(정시윤의 상소문 중에서)’

숙종 24년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재직하던 시절, 정시윤은 청나라에서 교역미(交易米)를 빌려오자는 의논에 대해 반대하며 조정 신하들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가 윤지선과 최석정 등 서인계 인사들의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됐다.

정시윤은 일련의 상황을 접하면서 정쟁에 염증을 느끼고 산천에 의탁해 당화(黨禍)로부터 몸을 지키기로 마음을 굳혔던 듯하다. 이에 따라 외직에만 전전하면서 여기저기 새로운 거처를 물색했다.



<마재와 정씨의 정착>

정시윤은 한강의 물가를 따라 올라가면서 한강의 상류 부분인 소천에 자리한 반고(盤皐)에 자리를 잡았다. 정시윤은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임청(臨淸)’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

정시윤의 세 아들들은 소천에 터를 닦았다. 동쪽에는 큰아들이, 서쪽에는 둘째 아들이 거주했고 막내는 임청정을 물려받았다.

마재마을에 정착한 정시윤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마재를 지키며 살아왔다.

“강을 따라 10리 거리에 왕왕 관직으로 이름난 집안으로 세거하는 마을이 많다. 청탄靑灘은 여씨 집안의 장원莊園이 되었고, 두릉은 정씨의 고장으로 불린다” 라는 김윤식의 증언처럼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두릉 정씨’라 이름 했다.

마재의 ‘두릉 정씨’들은 선대에서 자리 잡은 터전을 가꾸며 살았지만, 경제생활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 목민심서

마재 마을이 위치한 소천은 농토의 부족으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리고 한강 뱃길을 이용한 상품 물화의 집산지라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항상 마을은 번다했다고 정약용은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이후부터 서울은 전국적인 상품유통의 중심지가 되고 경기도의 군현으로 육로나 수로를 통해 서울과 직결되는 지역들인 개성·수원·광주(송파)·양주·포천 등이 서울로 가는 상품의 중간 집산지로 발전해 왔다. 서울 근교의 군현들은 서울 주민이 소비할 채소와 과일의 생산과 땔감 공급지로서의 기능을 했다.

이와 함께 한강변에는 상업 취락도 발달하였다. 상업취락들은 이미 조선추기부터 나타나 17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9세기 말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강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로 인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상업적 취락이었던 마재에서 두릉정씨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특수작물 중심의 원예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는 다산과 그 자제들이 학문으로 연구했던 대상이기도 하며 다산학의 주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이렇게 두릉 정씨들은 한강 상류에 형성된 선조의 별서에서 서울 학계의 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가문의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희망주의로 새로운 나라를 꿈꾼 19세기의 지성, 정약용>

다산은 1796년 10월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돼 정조와 역사적 만남을 가졌고 박제가 등 북학파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해 북학사상을 수용했다. 이를 계기로 훗날 실학을 회합하는 기반을 다졌다.

정조 때부터 끊임없던 다산에 대한 모함은 정조의 사후 유배로 귀결됐다. 셋째형 약종이 죽고 둘째형 약전과 자신은 죽음은 면했지만, 고난의 유배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산은 좌절과 절망을 딛고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강진에서의 18년 간의 유배생활에서도 학문에 대한 다산의 열정은 대단했다. 경학(經學)에서 경세학(經世學)으로 체계화된 다산의 방대한 저작이 이 시기에 대부분 이루어졌다. 이는 제자들과 분업화된 공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기도 한다.

     
▲ 정호선 시판 : 정호선이 시를 지은 것을 후에 정약용이 다시 쓰고 새겼다.(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다산의 유배지 제자에는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됐다. 그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힘입어 적지 않은 성과를 생산했다. 정학연(丁學淵)·정학유(丁學游·1786~1855)·황상(黃裳·1788~1863)·이청(李 田+靑·1792~1861) 등이 중심인데,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진다.

해배 이후 다산은 강진에서 마무리 한 저술을 정리하는 한편, 그 결과를 토대로 당색을 넘어 제자들과 김정희·홍현주·서유구 등 서울의 문사(文士)들의 학문 교류를 주선했다.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긴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지성사를 대표한다.

다산이 서거하자 정조의 사위였던 홍현주는 ‘열수(정약용)의 죽음은 조선의 만권 서고가 무너진 것과 같다’며 애석하게 여겼고, 매천 황현은 남인이면서 남인에게 비판받고 소론과 노론도 아니면서 이들에게 인정받은 유일한 인물로 정약용을 평가했다.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던 정약용은 1907년 교과서에 처음 등장해 ‘근대의 길’을 상징하게 되었고, 일제 침탈기에는 민족혼을 찾자는 국학운동의 대표적 실학자로 조망을 받았다.

그리고 ‘신아구방(新我舊邦·구습에 젖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바꾸리라)’의 개혁정신은 아직도 우리가 정약용을 찾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