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성에 ‘공부의 길’을묻다

2019. 12. 24. 11:16강의/공부법

[BOOK l 새책 - 공부의 발견]

‘교육열’은 있어도 ‘학구열’은 없는 나라, 한국. 칼 야스퍼스의 통찰을 빌자면 ‘기술을 가진 네안데르탈인’들이 우글우글하다. 어린이들은 몇 개의 학원을 다니느라 책가방이 무겁고, 청소년들은 기러기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조기 유학길에 오르고, 대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필수가 된 어학 연수를 떠난다. 취업에 성공하고도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직장인들은 격무에 시달린 몸을 이끌고 학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누구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바로 ‘공부를 왜 하는가?’란 근본적 물음이다.

‘공부의 발견’(현암사)은 “정녕 공부가 전쟁이 아니라,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음이 점점 윤택해지고, 투명해지고, 삶이 충만해지는 그런 세계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물으며 이 대답을 조선시대 현인들에게 구한다. 저자 정순우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공부론에는 항상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함께 있다”며 “이 질문을 포기한 오늘날의 교육은 원래의 목적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 우리의 교육열, 그 병리적 현상

정 교수는 “오늘날 한국은 교육이라는 뜨거운 불가마에 들어앉은 형국”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지만 입시지옥, 망국적인 과외 열풍, 왜곡된 학교문화 등을 만들어낸 주범으로 비난받기도 하는 교육열. 한국의 교육열은 한국교육의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 교수는 “교육열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전근대 사회의 ‘공부론’이 소진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교육 이념”이라고 설명한다.

교육열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조선시대에도 성장기의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지금의 교육 방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동을 교육의 주체로 두지 않고, 언제나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대상으로 다룬다는 것. 이 점 때문에 현대의 아동중심 교육학은 강한 비판과 의문을 제기한다. 조선시대 교육이란 아이들을 어른들의 시각으로 주조하고 양육하려고 시도하는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이유는 분명했다. 조선 선비들은 아동에게 아직 주관적인 견해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가르치는 사람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들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지나간 시대의 성인의 말을 수없이 반복 교육해 아동들의 몸에 젖어들게 하는 교육을 선택했다. 가정교육도 중시했다. 조선의 아동들은 아동들은 집에서 편안하게 뛰어놀지 못했다. 늘 팽팽한 심리적 긴장 상태였다. 그 이유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집을 세속적인 생활공간이 아닌, 좀더 고양된 차원의 교육공간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교육열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사회다. 선비 한 사람 한 사람은 치열한 구도자처럼 학문에 열중했으나, 수만장의 고문서를 뒤져도 교육열로 지금처럼 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예는 발견할 수 없다. 향교는 언제나 비어 잡초가 무성하고, 성균관은 생원들을 불러모으기에 급급했다. 서당에서 훈장들은 아동들을 열심히 지도했으나, 치맛바람이 일어나거나 학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길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선의 교육적 열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열’보다는 ‘학습열’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 조선 시대의 공부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긴 도정이며, 공부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성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극복의 과정이다.

교육과 지식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고, 경쟁의 도구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교육관 앞에서 종래 유학의 공부론이 지향한 덕성 중심의 배움은 설 자리를 잃었다. 우리의 교육열이 지금까지 근대화를 이끌어 온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돌격형 교육열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 조선의 지성 6인의 공부론

공부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기 위해 조선의 지성들에게 직접 물어보자.

화담 서경덕은 무심(無心)의 공부를 추구했다. 시를 애써 읊을 필요가 없는 상태, 마음속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성인마저 버린 경지, 책조차 오래전에 잊고, 마음과 몸이 무사무위에 이르는 상태, 이것이 화담 공부론의 최종 지향점이다. 화담은 무위ㆍ무형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마음을 비우고 경(敬)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계 이황은 공부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성취할 것이며,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논의를 했다. 퇴계는 새로운 공부론을 정립하기 위해 유학의 도통(道統)을 새롭게 정리했다. 어떤 학문이 올바른 학문인지 어떤 학문을 버려야 할 것인지 유학의 역사를 더듬어 가면서 밝혔다. 퇴계의 관심거리 중 하나는 일상의 삶과 도의 세계의 연결이다. 일견 사소하고 자질구레하게 보이는 일상에 대한 공부가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에는 융회관통하여 도의 세계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퇴계는 유가 특유의 시간관, 하루를 시간 단위로 나누고 각 시간마다 해야 할 과업을 제시하는 방식에 맞추어 살았다.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동트기 전 깨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말없이 앉아 심신을 추슬렀다. 이렇게 천리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면 일상이 본질적인 세계와 맞물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기계적인 암기와 맹목적인 지식 축적에만 매몰된 오늘의 교육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남명 조식은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남명의 경의(敬義) 사상에서 ‘경’은 마음을 밝히는 일이며 ‘의’는 밖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이다. 또 남명은 욕심을 걷어내고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노력했다. 배운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덕 시간에 배운 사항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오늘날 몇이나 되는가.

교산 허균은 자유정신과 천재적 광기로 성리학의 모순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겨누었지만, 철학적 대안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인간을 관념적 존재가 아닌 감성과 미학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파악하며 새 인간형을 창출하려는 허균의 노력은 큰 의미가 있다.

순암 안정복은 기존의 성리학이 생활 속의 교육, 구체적 삶을 중시하는 교육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안정복의 노력은 후일 다신의 생각에서 좀 더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결실을 맺는다. 정약용은 성리학의 공부법을 비판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원래부터 덕(德)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없었기에 경전을 읽다가 덕이라는 글자에 마주칠 때마다 까마득하여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며 “결국 일이 닥치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지조차 모른다”고 말했다. 다산은 덕이 개인적인 차원의 선이나 극기의 윤리로 한정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공동체의 윤리질서로 발전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6명이 공부에서 추구한 바는 모두 다르다. 다만 이들에게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배울 점이 있다면, 지식과 성찰을 자랑거리로 삼거나 출세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는 것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왜 금쪽같은 시간을 할애해 공부해야 하는가.

이고운 기자(ccat@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