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홀리고, 메모에 미쳤던… 옛사람들 이야기

2019. 12. 24. 11:38강의/공부법

책벌레와 메모광 / 정민 지음 / 문학동네

헌책방에 가면 때로 책 맨 앞장에 한 획 한 획 신중을 기해 적은 이름 석자를 본다. 언젠가 이 책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지만 무슨 사연이었는지 책을 떠나보내야 한 사람들이다. 책에 적힌 이름은 다음 책 주인에겐 ‘낙서’일 뿐이니 제값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책이 폐기되지 않는 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셈, 썩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선인들도 책에 이름을 남겨 책 소유를 드러내는 일을 즐겼다. 책의 주인이 본인임을 밝히는 도장, 장서인(藏書印)이다. 한데 장서인을 대하는 한·중·일 세 나라의 방식이 달랐다. 한국은 옛 책의 장서인이 지워진 경우가 많다. 조상 혹은 자신이 소유하던 책을 지켜내지 못하고 남에게 팔아먹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책을 훼손하면서까지 예리한 칼로 도려냈다. 결국 체면 때문이다. 일본은 전 주인의 장서인 위에 ‘소(消)’자가 새겨진 말소 도장을 찍고, 새 주인의 장서인을 박았다. 매몰차지만 깔끔한 뒤처리가 ‘일본’스럽다. 중국은 호방하기 그지없다. 전 주인의 장서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손대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자기 장서인을 하나 더 찍었다. 이 사소한 행위에서도 세 나라의 민족성이 엿보인다고 하면 과한 생각일까.

‘책벌레와 메모광’은 이처럼 책과 메모를 둘러싼 옛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 저자(정민·사진)가 동양학 연구의 본산이라 불리는 미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 방문학자로 머물면서 고문서를 탐독한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냈다. 다산 정약용, 형암 이덕무, 성호 이익 등 학자와 수많은 장서가(藏書家)들의 일화가 버무려져 읽는 맛이 제법이다. 여기에는 대중서를 많이 집필한 저자의 글솜씨도 한몫하는 듯하다.

책에 따르면 쇄서(쇄書)는 옛 애서가들의 연중행사였다. 포쇄(曝쇄)라고도 했는데, “1년에 한두 차례 볕 좋고 바람 시원한 날 방안의 책을 모두 꺼내 바람 잘 드는 마루나 그늘에 펼쳐놓고” 말리는 일을 뜻한다. 곰팡이가 슬거나 책벌레가 책을 갉아먹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책벌레 중 맥망(맥望)이란 녀석이 있는데, 그 고사가 재미있다. 책벌레가 책 속에서 신선(神仙)이란 글자를 세 차례 이상 갉아먹으면 맥망이 되고, 이 맥망을 밤중에 별에다 꿰어 비추면 별이 내려와 환단약을 구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을 물에 타 먹으면 환골탈태하여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전설이다.

이덕무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애서가였다. 그가 서재에 붙인 이름 중 하나인 구서재(九書齋)는 지금도 가르침이 유효하다.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인 구서는 독서·간서·초서·교서·평서·저서·장서·차서·포서를 의미한다. 이같이 책을 소리 내 읽고, 눈으로 읽고, 베껴 쓰고, 비평하며 잘 보관하고 나아가 직접 책을 저술한다면 못 이룰 일이 무엇인가.

책을 사랑하는 이들은 대개 메모광인 경우가 많다. 이덕무도 그때그때 적어둔 메모를 모아 ‘앙엽기(앙葉記)’라는 책을 냈다. 앙엽은 항아리에 든 잎사귀에 적은 메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과거 가난한 중국 선비가 밭에 항아리를 묻어두고 농사를 짓다가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감잎에 글을 써 넣어두었던 일화에서 왔다. 수많은 선비들이 이렇게 곁에 옹기나 궤를 두고 메모를 써넣고, 후에 꺼내보며 글을 펼쳤다.

최고의 메모광으로 꼽히는 이는 다산이다. 일단 다산은 초서, 즉 베껴 쓰기를 주요 공부법으로 생각해 제자들을 독려했다. 저자는 초서의 모음집인 총서의 유무로 다산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아끼는 제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바로 다산이 얼마나 그에게 메모(증언첩)를 많이 남겼느냐는 것이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