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한국초상화 톺아보기]강화도령 철종은 사팔뜨기

2019. 4. 25. 13:54한국사

초상화를 그 초상화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一毫不似 便是他人’(일호불사 편시타인, 터럭 한 오라기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의 명제는 중국에서 비롯됐지만 우리나라에서 만개하면서 극사실주의 화풍이 크게 유행했다.

그와 동시에 형상을 그대로 옮기는데 그치지 않고 내면의 정신을 외면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 ‘성어중 형어외’(誠於中 形於外)라는 귀절이 있다. “마음에 내적인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이 밖으로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다”라는 의미다.

 

조선의 선비들은 외모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전신사조(傳神寫照) 풍조이다.

사실 조선초상화 제작에는 원시적인 형태의 카메라인 ‘옵스쿠라’가 이용되기도 했다. 암실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사람의 모습을 반대편 벽에 거꾸로 비추고 이를 그대로 따라 그리는 방법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는 “이기양이 나의 형 정약전 자택에 ‘칠실파려안’(漆室坡黎眼)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따라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적혀 있다. ‘칠실’은 매우 캄캄한 방, ‘파려’는 유리, ‘안’은 본다는 뜻으로 깜깜한 방에서 유리렌즈로 보는 장치라는 뜻이다.

 

사팔뜨기 채제공 초상.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채제공(1720~1799)의 초상화는 마치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듯 하다. 그는 정조 치세에 10여년간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탕평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당쟁을 진정시켰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는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을 주도했다. 조선 전기의 명재상으로 황희가 언급된다면 후기에는 그 영예가 채제공에게 돌아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24세이던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급제해 1771년(영조 47)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이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788년(정조 12)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고 3년 동안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獨相)으로 재직했다. 이어 1793년 드디어 영의정에 등용됐다.

 

채제공의 초상화는 정조의 극진한 배려로 △정장관복인 흑단령본 △오사모에 서대를 두르고 담홍색 포를 입은 시복본 △의례용인 금관조복 차림의 초상화와 밑그림으로 사용됐던 유지초본 등 다수가 전해온다. 그의 초상화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당대국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뛰어난 실력의 어진전문화기인 이명기가 작업했다. 그런데 이 초상화에서 채제공의 양 눈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시(斜視)인 것이다.

역시 사시로 묘사된 철종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25대 철종도 채재공 처럼 사팔뜨기였다. 보물 1492호 철종어진에서 오른쪽 눈은 정면을, 왼쪽 눈은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높은 권위의 초상화인 어진인데도 화가들은 기어코 사시로 묘사한 것이 이채롭다. 철종 12년(1861) 도화서에서 그린 것으로 조선 어진 중 유일한 군복본이다. “이마가 각지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두 광대뼈에서는 귀밑털이 덮여있다. 귀의 가장자리는 넓꼬 둥글었으며 입술은 두꺼웠고 손이 컸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오명항 초상. 얼굴은 검고 마마자국이 가득하다. 경기도박물관 소장

조선 초상화에는 곰보얼굴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묘사돼 있다. 천연두는 종두법이 개발되기 전 호환보다 무서웠다. 천연두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고 운좋 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낙인처럼 평생 얼굴에 흉한 곰보자국을 갖고 살아야 했다. ‘삼국사기’에 “선덕왕 6년(785)에 왕이 갑자기 진이 돋는 병에 걸려서 13일 만에 죽었다”는 천연두 기록이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는 50여 차례 천연두가 언급돼 있을 만큼 천연두는 흔하고 두려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상화. 찢어진 눈, 사마귀, 마마자국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천연두 예방법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유난히 곰보얼굴이 많았다. 초상화에도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잘 반영된다. 무장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고 병자호란 때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했던 구인후(1578~1658)는 얼굴에 마마자국이 가득하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우의정에 발탁됐던 오명항(1673~1728)도 심한 곰보였다. 오명항은 낯빛까지 검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남은 사람 중 유명인사로는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 정조대 문신인 이서구, 대동법의 주역 김육, 조선 최고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저자 서유구 등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