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 기자의 한국초상화 톺아보기] 종2품에 오른 성공한 화가 겸재 정선

2019. 4. 25. 14:07한국사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는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실은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불후의 명작이다. 국보 217호 '금강전도'는 마치 항공촬영을 하듯 하늘 위에서 금강산 1만2000봉우리를 장대하게 담아내 금강산 그림 가운데 단연 최고로 평가받는다.


이들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1676~1759)은 중국 관념산수의 답습이 아닌 중국 화본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제 산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였지만 중인신분의 김홍도와 신윤복 등과 달리 양반 출신이었으며 성리학 등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벼슬까지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드물게도 '성공한' 화가였다. 건강한 삶을 살아 84세라는 기록적인 수명도 누렸다.

겸재는 서울 북악산 남서쪽 자락의 순화방 유란동(경기고 부근)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은 가난했으며 14세 때 아버지까지 여의게 되자 생계를 위해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의 집은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김수항과 그의 아들 여섯('6창'으로 불렸던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 등 신흥 안동 김 씨 가문 근처에 있었다. 겸재는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면서 인연을 쌓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화단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냈다.

두 차례에 걸친 금강산행은 화가로서의 시각과 화단에서 그의 명성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36세(1711년) 때 1차 여행은 '신묘년 풍악도첩' 13폭을, 1년 뒤인 37세 때 2차 여행은 ‘해악전신첩' 30폭을 만들어냈다. 이중 해악전신첩이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았으며 진경산수 화가로 입지를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창흡의 동생 김창업(1658~1721)이 이를 청나라 연경으로 가져가 중국 화가들에게 품평을 받았는데 "공재(윤두서)를 능가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안타깝게도 이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걸작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청하(포항)현감으로 재임하던 1734년에 탄생했다. 겸재의 유별난 금강산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1747년인 72세에 또다시 금강산을 그렸다. '정묘년 해악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이 그것이다.

 

인왕산에서 은일의 삶을 묘사한 '인곡유거도'의 인물 역시 정선인 것으로 이해된다.

겸재는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세자 때 겸재에게 그림을 배워 왕이 되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겸재'라면서 귀하게 모셨다. 겸재는 그는 40대 이후 관직에 본격 진출한다. 왕은 겸재가 화업(畵業)을 계속 하도록 산수가 빼어난 지역의 지방관으로 나갈 수 있게 배려했다.

 

65세부터 70세까지 경기도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제작했다.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지를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직접 발로 걷고 배를 타고 가면서 그린 그림들은 300년 전 한강과 서울 교외의 자취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가장 친한 벗인 이병연(1671~1751)이 시를 덧붙인 이 화첩을 무척 아꼈던 그는 '천금물전'(千金勿傳·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이라는 인장까지 남겼다.

겸재는 1727년 북악산 남서쪽 집을 아들에게 물려준뒤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으로 이사해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76세 되던 해인 1751년 인왕산의 웅장한 자태를 최고의 필치로 묘사한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백악산', '백운동', '필운대', '세검정' 등 진경산수화의 백미들이 쏟아냈다.

겸재는 말년에 인왕곡에서 은일의 삶을 즐겼다.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그린 그림이 2점 남아 있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를 말한다. 인곡유거도는 자신을 너무 작게 그려 차림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독서여가도는 표정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독서를 하면서 여가를 즐긴다는 의미의 '독서여가도' 속 인물은 정선 자신인 것으로 추정된다.

독서를 하면서 여가를 즐긴다는 뜻의 '독서여가'는 툇마루에 나와 앉아 망중한에 젖어 있는 선비를 그렸다. 선비는 정선 자신이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겸재는 한 손에 부채를 들고 편안한 자세로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 초가집과 책장의 책들, 화분에 핀 난초와 작약, 방 뒤쪽에 서 있는 푸른 향나무 등은 겸재가 추구했던 소박하면서도 고상한 정신세계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책 읽기를 일삼고 서화에 뛰어나며 자연과 풍류를 즐기던 조선 시대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실 그는 화가였지만 학문에 심취했다. 따라서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은 그가 탐독했던 주역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안료가 산화돼 안면 등의 부분이 까맣게 변질됐지만 실제 독서여가도 속 그의 얼굴에서는 온화하고 격조 높은 선비의 인상이 풍긴다. 체구가 자그마하며 얼굴에 살집이 좀 느껴진다.

 

인곡유거도에서 조그만 기와집의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선비가 겸재일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에 나타난 소탈한 구성과 단아한 필묘, 고운 담채, 조용하고 편안한 경치는 겸재가 조용하고 정취를 즐기는 인물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겸재는 총 4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영조대의 실학적 기풍이 태동하던 시절에 이런 혁신적인 그림은 지식인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10억원은 훌쩍 넘기지 않았을까.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