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한국초상화 톺아보기] 박문수는 어떻게 ‘암행어사의 아이콘’이 됐나

2019. 4. 25. 14:07한국사

마패와 남루한 옷차림이 먼저 떠오르는 ‘암행어사’하면 단연 ‘박문수’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암행어사 박문수 얘기는 1970~80년대 TV나 라디오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암행어사 출두야”라는 박문수의 호령에 지방수령들이 혼비백산해 도망하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국왕의 명으로 몰래 지방관을 감찰하고 그들의 비리를 척결하던 관원이었다. 조선시대 숱한 암행어사가 파견됐지만 유독 박문수만이 암행어사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전국에서 박문수와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어사 설화는 무려 200개가 넘는다. 오늘날까지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드라마나 소설 등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설화에서 박문수는 남들이 밝혀내지 못하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누명을 쓴 백성을 구명해 풀어주는 정의의 심판자로 그려진다.

박문수는 어떤 사람일까. 박문수(1691~1756)는 33세 과거에 급제해 사관으로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이인좌의 난(1728) 때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전격 발탁되고 분무공신 2등에 올랐다. 이후 동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고 세손을 가르쳤으며 66세의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병조, 호조판서, 우참찬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는 뜻밖에도 당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소론의 강경파로 노론과 대립했다. 경종 때 연잉군(후일 영조) 편에 섰다가 죽임을 당한 노론의 핵심인물 조태채와 갈등이 극심했다. 궐내에서 숙직을 하던 박문수는 반찬으로 콩나물이 나오면 “콩나물 대가리는 잘라 버려야 한다”며 떼어내고 먹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콩나물의 한자 표현은 ‘太采’(태채)이다.

이 같은 박문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설화와는 달리 실제 역사 속에서는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없다. 실록에 따르면 박문수는 1727년 9월 25일부터 이듬해 4월 14일까지 약 6개월간 ‘영남별건어사’로 활동했다. 별견어사는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보살피거나 양역(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을 바로잡기 위해 감독과 순찰의 의무를 띄고 파견된 관리로 암행어사와는 많이 다르다.

박문수는 이후에도 1730년 호서어사, 1731년 영남감진어사, 1741년 북도진휼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 몇 차례 더 유사한 직책을 맡는다.

 

박문수는 호조판서로 재임하면서 군포(병역을 면제해주는 조건을 징수하던 베)의 폐단을 줄여야한다고 주장해 균역법 제정을 주도했다. 사람 단위로 부과하던 군포를 가구 단위로 전환해 농민부담을 경감시키는 대신 부족한 재원을 어전세, 염세, 선세 등을 신설해 채우는 획기적 제도이다. 별건어사로 재임하면서도 비록 기간은 짧았지만 환곡(춘궁기에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회수하던 국가 비축 곡물)을 풀어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했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지방의 현감과 판관, 부사 등의 자질과 업무수행 등을 판단해 술을 좋아하고 지식이 밝지 못하며 간사한 지방관들을 파직할 것, 명망 있는 인물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는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 받았고 함경도에서는 그를 위한 송덕비까지 세워졌다. 그의 생애를 통해 백성을 구휼한 행적이 여러 차례 확인되지만 당대에 암행어사의 대표격으로는 추앙받은 사실은 없다. 오히려 후대에 들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바라는 염원이 그를 영원한 암행어사로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구국 영웅의 출현을 갈구하던 일제시기 ‘박문수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러한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그의 영정은 영조 2년인 1728년 제작돼 종가에서 보관해 왔으며 보물 1189호로 지정됐다. 단아한 얼굴에 수염이 많지 않다. 이 영정이 젊은 시절 박문수를 그린 것이라면 일본 덴리대 소장 영정은 중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박문수가 ‘암행어사의 아이콘’인 만큼 ‘청백리의 아이콘’은 단연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1363~1452년)이다. 박문수가 암행어사가 아니었던 것처럼 황희 역시 청백리가 아니었다. 세종대왕이 일반인 차림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멍석을 깐 채 누런 보리밥과 된장, 고추로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 청백리 일화는 황희 정승의 여러 일화 중에서도 유명하다.

 

황희는 고려 공양왕 즉위년인 1389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에 제수됐다. 황희는 56년간의 관직생활 중 재상으로 24년을 있었고 그 중에서 영의정만 18년을 했다.

명재상이기는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고위직에 있으면서 각종 비위에 연루돼 청렴하기는 커녕 부패했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매관매직, 사위의 살인사건 무마 청탁 등 비리 혐의가 끊이지 않았으며 공직자 감찰기구인 사헌부 수장으로 재직 때엔 승려에게서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으로 불렸다. 심지어 조선개국공신이면서 2차 왕자의 난 때 참형을 당한 박포의 부인과 간통하기도 했다.

황희는 조선왕조 초기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는 조정자로서 탁월한 판단력과 정무감각을 발휘한 행정가로 평가된다. 황희가 말년에 관직을 사양 했을 때 “집에서 근무해도 좋으니 조정의 일을 봐 달라”고 간청할 만큼 그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냈던 세종에게 공직자로서 그의 사소한 의혹과 결점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행정의 달인이기는 했으나 결코 청렴하지 않았던 황희의 청백리상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됐는지 알 수 없지만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전해져 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청빈한 공직자가 매우 드물었다. 민초들은 조선시대 공직자의 대표주자였던 황희 정승에 청백리 이미지를 심어 부정한 공직자들이 본받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희 초상화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인 경북 상주 옥동서원 영정을 조선후기에 모사한 것이다.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는 이 초상화 원본은 황희가 62세(1424년)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