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한국초상화 톺아보기] 효자 영조가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은 이유

2019. 4. 25. 14:11한국사

신숙주(1417~1475)가 단종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게 사실일까.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파수편(破睡篇)과 월정만필(月汀漫筆)의 구절을 인용해 “노산의 왕비 송 씨가 관비가 되니 신숙주가 여종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청을 듣지 않고 단종비에게 궁중에서 정미수(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 즉 문종의 외손자)를 기르도록 명했다”고 전했다.

 

단종비 정순왕후를 첩으로 삼으려고 해 지탄받았던 신숙주 초상

이런 내용은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택영이 구전 등을 정리해 엮은 ‘한사경’에도 언급된다. 김택영은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도 사악한데 (신숙주가) 단종 부인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짓”이라고 논평했다.

 

단종비 정순왕후(1440∼1521)는 미인이었다. 신숙주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이끌려 주군의 부인이던 그녀까지 첩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목숨은 길어 증손자뻘인 중종 18년 8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는 남편 묘가 있는 강원도 영월(장릉)이 아닌 경기도 남양주(사릉)에 묻혔다.

신숙주는 왕을 6명이나 섬기며 영의정을 두 차례 역임하고 국방과 외교에 탁월한 공적을 세웠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다. 세종 때 일본어·몽골어·만주어 등 외국어에도 두루 능통한 전문 외교관으로 인정받았고 집현전 8학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세종이 주도한 훈민정음 창제의 일등공신이었다. 만주에 유배된 명나라 언어한림학사 황찬을 만나기 위해 10여 차례나 내왕해 한글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뒤에도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을 집필해 창제뿐 아니라 보급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같은 명성과 업적은 세종과 문종, 단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세조의 편에 서면서 물거품이 됐다. 조선 후기 이후 도덕과 의리를 중시했던 사림파가 사육신을 추앙하는 대신 승자를 쫓았던 신숙주를 변절자로 낙인 찍으면서 그 이름은 배신의 상징이 됐다.

초록색 관복 차림을 한 신숙주 초상(고령 신씨 문중 소장)은 그의 성품 등을 잘 표현했고 채색이나 선 묘사도 뛰어나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성종 6년(1475년)에 새롭게 고쳐졌으며 얼굴 음영 처리나 표현 기법을 볼 때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수정·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1977년에 보물 613호로 지정됐다.

국보 초상화는 이제현·안향·송시열 초상, 윤두서 자화상, 조선 태조 어진 등 5점이다. 그러면 이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인 보물은 몇 점일까. 결론적으로 어진 2점, 초상화 67점, 승려 진영 5점 등 총 74점이다.

가장 먼저 보물에 오른 초상화는 조선 중기 문신인 정탁(1526∼1605년) 영정이다. 그의 초상화는 1968년에 보물 487호로 지정됐다. 정탁은 임진왜란 당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을 천거했고 옥중에 있던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해 죽음을 면하게 했다. 이황의 제자로 명종실록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영조의 왕자시절 초상. 효자이던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 씨에게서 “침방나인 시절 누비옷 만드는게 제일 힘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어진, 영조 어진(보물 932호), 연잉군 초상(보물 1491호), 철종 어진(보물 1492호) 3점이 전부인데 국보인 태조 어진을 제외한 3점 모두 보물 명단에 올라 있다. 영조 어진은 영조 20년(1744년)에 장경주와 김두량이 그린 원본을 보고 1900년 채용신과 조용진이 이모해 제작한 어진이다.

 

연잉군 초상은 영조의 왕자 시절 모습을 담고 있다.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숙빈 최 씨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7세 남짓한 어린 나이에 무수리로 입궁했다. 그러다 보니 숙종에게 승은을 입기까지 15년 동안 궐내에서 온갖 천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 힘들게 살았다. 연잉군은 어느 날 어머니를 찾아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침방나인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누비, 오목 누비, 납작 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고 최 씨가 대답했다. 연잉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조는 이후로 평생 누비옷을 걸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육상궁을 지어 극진히 혼령을 모셨다.

숙빈 최씨는 1711년부터 사망하던 1718년까지 연잉군 사저에서 지냈다. 연인군 초상은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시고 있던 21세(1714) 때 진재해를 데려와 그리도록 했다.

보물 초상화는 거의 대부분 조선시대 것이지만 고려시대 인물도 일부 있다. 거란 소배압 군대를 격파한 강민첨(?∼1021), 공민왕을 도와 친원파 타도에 앞장섰던 염제신(1304∼1382년),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함께 3은(三隱) 중 한 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초상화가 각각 보물 588호, 보물 1097호, 보물 1110호, 보물 1215호로 지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강민첨 초상화는 정조 12년(1788) 박춘빈이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에 이모한 데다 예술성도 떨어지는 편이지만 고려시대 초상화가 극도로 희귀한 상황에서 고려 공신상 형식과 표현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그림이다.

마찬가지로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염제신 초상화는 동시대 초상화인 안향·이제현 초상화와 같은 구도와 화풍이 나타나며 전체적으로 옷의 덩굴무늬 등이 섬세하게 잘 묘사돼 고려시대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이는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공민왕이 친히 그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은 염제신뿐만 아니라 윤태 등 여러 신하 얼굴을 직접 화폭에 담아 하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공민왕의 탈권위와 뛰어난 예술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보물 초상화 중 친근한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워 학문 진흥에 힘썼던 주세붕(1495∼1554) 초상(보물 717호)은 간략한 선으로 얼굴을 묘사했지만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래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뤄 제작연대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 데 비해 학자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귀한 자료다.

남인과 소론을 공격해 살육하고 정조와 대립했던 노론 벽파 영수 심환지(1730~1802) 초상화(보물 1480호)는 19세기 초반 극사실적인 초상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영의정이 된 1800년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의 높은 지위를 고려할 때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이명기나 그에 버금가는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물 개성이 잘 드러난 얼굴 묘사와 질감 특성을 극대화한 기물의 표현으로 박진감 넘치는 시각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우수어린 얼굴의 김시습 초상.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조 왕위찬탈사건 이후 세상과 타협을 거부한 채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초상화는 보물 1497호다. 신동이라는 소문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지만 세조 왕위찬탈사건 이후 세상과 타협을 거부한 채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과 수많은 시편을 남겼다. 초상화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인데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라는 서유영(1801~1874)의 기술과 상통하며 눈에서는 생생한 총기가 느껴진다.


가장 많은 초상화를 보물에 등재시킨 인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6점)이며, 2점 이상은 이색(4점), 정조 시대 명재상인 채제공 3점,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2점, 정몽주 2점 등이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