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

2019. 4. 18. 12:54세계사

영어로 남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husband다. 이 말을 음절로 나눠보면 hus는 집을 가리키고 band는 고대 노르웨이어로 주인이라는 의미다. 즉 husband의 어원적 의미는 집주인인 것이다. 집이라는 의미의 hus는 1066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에 프랑스식 철자로 바뀌면서 house가 되었다. 프랑스어에서는 u를 ou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영어라는 고유어의 단어가 외국어인 프랑스어에 의해 철자까지 바뀐 것이다. 1066년 잉글랜드 남부 헤이스팅스에서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노르만족 군대와 잉글랜드 군대의 싸움(헤이스팅스 전투), 잉글랜드의 군인들은 도끼를 들고 노르만 기사들과 맞선다. 도끼를 든 잉글랜드 보병들은 huscarl이라고 불렸는데, 역시 집이라는 의미의 hus와 장정이라는 뜻을 가진 carl의 합성어다. 즉 ‘집안의 장정’이라는 뜻이다. 게르만 계열 남자들의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Karl, 프랑스 남자들 이름에서 볼 수 있는 Charles이 바로 carl에서 나왔다. 남자라는 의미를 부여해주는 이름이다. husband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남자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Henry(헨리 or 앙리)는 독일어 Heinrich에서 왔다. 독일어로 집을 뜻하는 heim(영어의 home)과 왕을 뜻하는 rich의 합성어. 영어로 부유하다는 의미의 rich가 이 말에서 나왔다. 즉 Henry도 husband처럼 집안의 왕, 가장이라는 뜻. 헤이스팅스에서 승리를 거둔 윌리엄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다. 앵글로색슨 왕조가 종말을 고하고 프랑스 계통의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이후 잉글랜드의 왕들은 Henry, Richard와 같은 프랑스식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다가 Edward 1세에 와서 다시 영어식 이름이 등장한다. 고대 영어에서 ed는 ‘부’ 혹은 ‘번영’을 의미하고 ward는 현대 영어의 warden처럼 ‘관리인’ ‘수호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 에드워드 1세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프랑스 계열이다. 에드워드 1세는 왜 영어식 이름을 고집했던 것일까? 브리튼섬의 주인인 앵글로색슨족과 하나가 되고 싶었기 때문. 자신은 프랑스 계통이지만, 왕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앵글로색슨족에게도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 3분 세계사, 김동섭, 시공사, 2017)

스페인어 Santa나 San은 영어의 Saint와 의미가 같으며 ‘특별한 수준의 성스러움’이나 ‘덕을 가진 성인’을 의미한다. 이는 기독교에서 유래되었으며, 종교인들에게 특별한 성스러운 존재다. San Francisco와 San Diego의 San은 바로 Saint의 의미다. 칠레의 수도 Santiago도 그 뿌리가 같다. Santa Claus는 Saint Nicholas의 준말로 ‘성인 니콜라스’를 이르는 말이다. 미라Myra 지방의 주교였던 세인트 니콜라스(270~343)는 어린이들을 좋아했으며, 매년 12월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정신은 십자군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문화가 미국에 정착되면서 전 세계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해마다 12월이면 ‘산타클로스의 고향’ 핀란드의 ‘로바니에미’ 마을 전체가 분주하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온 편지와 카드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산타 마을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산타 우체국에 모인 지역 주민들은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보내온 편지와 카드에 일일이 답장을 써서 산타의 이름으로 우편을 발송한다. 1927년 핀란드의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가 “핀란드의 로바니에미 마을에 있는 코르바툰투리 산에 산타가 산다”고 말한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 단지 순록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산타클로스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핀란드 정부에 전달했다. 1950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로바니에미를 방문했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작은 통나무집과 산타마을이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해마다 12월이면 산타의 주소를 묻는 아이들에게 답변이 궁색했던 부모들은 이곳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 마을은 1985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조성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산타마을로 자리 잡았다.
(단어따라 어원따라 세계문화산책, 이재명 외, 미래의 창, 2016)

테디 베어의 탄생: 1902년 26대 대통령 시어도어Theodore(테디) 루스벨트는 미시시피 주를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미시시피 주가 ㅇ웃 루이지애나 주와 경계선 문제로 분쟁 중이었는데, 이를 중재하기 위해서엿다. 사냥을 좋아했던 테디는 바쁜 공식 일정 중에도 곰 사냥을 갔다. 이때 루스벨트가 나중에 최고의 곰사냥꾼이라고 격찬했던 홀트 콜리어가 곰을 몰아줬는데, 그는 평생 곰을 3000마리 넘게 사냥한 전문가였다. 어쨌든 미시시피 주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사냥하기 좋게 새끼 곰을 산 채로 잡아 나무에 매우 두고 대통령에게 총을 쏘아 잡도록 권했다. 대통령의 사냥 실력을 과시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런데 대통령은 불쌍한 새끼곰을 쏘는 것을 거부했다.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워싱턴 스타'으 시사만화가 클리포드 베리먼이 루스벨트와 새끼 곰을 그린 그림을 '선을 긋다'라는 문구와 함께 신문에 실었다. 이 만평은 곰 사냥에도 일정한 선이 있음을 표현한 동시에 당시 미시시피 주와 루이지애나 주의 경계선 분쟁을 중재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 원래 만편의 의도는 상업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만평을 재발견한 사람이 잇었는데, 바로 브루클린에서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던 모리스 미첨이었다. 마침 모리스 미첨과 그의 아내는 팔다리가 움직이고 눈을 깜빡거리는 곰 인형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 인형을 문제의 그 만평 그림과 함께 진열하며 '테디의 곰'이라는 이르믕ㄹ 붙였다. 그랬더니 곰인형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는 '테디'라는 이름을 자신의 곰인형에 붙여 사용하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스벨트는 모리스의 제안을 승낙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이 장난감 업계에 누가 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는 염려가지 담은 자필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탄생한 테디 베어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와 더불어 '루스벨트와 함께 사냥을'이라는 이름의 보드게임 같은 상품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한 신문에는 “돈 있는 사람들은 자동차의 사이드램프에 키가 90cm나 되는 테디 베어를 붙이고 다닌다.”라는 기사도 실렸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 3년간 미국에서 테디 베어 열풍은 대단해서 인형뿐만 아니라 저금통, 가방, 서류상자, 책, 카드, 재갈과 가죽끈, 우편엽서, 물총, 핀, 풍선 등 온갖 상품에 테디와 곰, 그리고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러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식적인 연설에서도 즐겨 테디 베어 유행을 언급했다고 한다. 곰돌이 인형의 귀여운 이미지와 함께 자신의 이미지도 덩달아 좋은 모습으로 전파되므로 당연히 좋아했을 것이다.
(카트에 담긴

전쟁에서 아군 병사들을

* 애초에 영국에 살던 원주민은 스페인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베리아족. 원시 부족인 이들을 몰아내고 켈트족이 들어왔으나 로마의 침입으로 민족이 갈렸다. 로마화한 켈트족은 주로 잉글랜드에 남고, 로마에 끝까지 맞선 켈트족은 서쪽 산악 지대인 웨일즈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남아 켈트의 정체성을 지켰다. 잉글랜드에 주둔하던 로마군단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자 라틴화한 켈트족은 다급해졌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켈트족의 침공과 복수 위협에 떨다 여러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과 데인족이 차례로 들어와 왕권을 차지하고 나라가 분열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피가 섞였다.

주류는 앵글로색슨족. 상류층은 데인족이던 잉글랜드에 노르만족이 침입해 정복한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노르만족은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족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곳에 거주하던 동족이었다는 점. 바다를 떠돌며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계 바이킹의 일족이었던 데인족은 바이킹의 습격에 진저리를 치던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거대한 영지를 하사받은 후 민족성이 빠르게 바뀌었다. 데인족 특유의 호전성을 유지하면서도 프랑스 문물에 완전 동화한 것.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다.

반면 영국에 진출한 데인족은 유럽 문명 본류를 접하지 않은 탓인지 민족성을 그대로 유지해왔으나 프랑스 데인족, 즉 노르만족에게 정복 당하고 말았다. 노르만 정복 직전 잉글랜드를 크게 발전시킨 데인족 출신 크누트 대왕의 꿈이 바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이었다. 혈연적 공통점이 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독일 북부, 잉글랜드를 하나의 제국으로 묶겠다는 크누트 대왕의 꿈은 ‘노르만 정복’으로 희미하던 가능성까지 사라졌다. 잉글랜드 문학 사상 최초의 작품인 베어울프(Beowulf)는 게르만족 영웅에 대한 서사시다. ‘햄릿’을 비롯한 세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주로 덴마크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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