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음악

2019. 4. 18. 12:50세계사

민족주의 음악: 19세기 유럽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비엔나 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국가의 틀을 짜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럽의 식민지들은 나폴레옹 전쟁 시의 혼란한 틈을 타서 잇달아 독립을 선언하고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으며,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인들 사이에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19세기 유럽음악계에서도 민족주의는 가장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였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출신 지역의 민속음악의 요소들을 통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적인 어법을 개발하였다. 고국을 떠나 일종의 실향민 신세였던 쇼팽이 고국 폴란드 음악의 민족적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쓴 것이나 리스트나 브람스가 헝가리 집시음악을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만큼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독일 민요가 슈베르트나 브람스, 슈트라우스, 말러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의 중요한 원천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1860년 이후 유럽에는 이와 같은 경향과 뚜렷이 구별되는 보다 강력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음악적 전통을 갖지 못한 국가에서 일어났다. 이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예속되어 있었던 독일 음악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민족주의는 자의식이 강하고 공격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음악은 자국의 언어에 기초하고 자국의 신화와 전설, 민요 등을 소재로 하여 의식적으로 민족적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많은 국민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한편 이 시대 산업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한층 계량된 관현악기의 표현력은 민속적 소재를 더욱 색채감 있게 그려내기에 유효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음악에 나타난 민족주의는 나라별로 그 양상이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러시아는 열렬한 애국주의를 표방하였으나,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미국의 아이브스 같은 민족주의 음악가들은 각각이 고립된 존재로 남았을 뿐 하나의 악파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며, 엘가나 멕도웰처럼 자기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만 민족주의적이었던 작곡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최소의 다소 공격적이었던 세대가 지난 뒤 민족주의는 다양한 방법으로 유럽음악의 주류와 절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가 유럽음악의 흐름을 바꿔놓고, 새로운 어법과 새로운 기법으로 이 흐름을 풍성하게 하였으며, 20세기로 흘러들어갈 수많은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서양음악사, 홍세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3)

 

낭만주의 음악의 배경: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 그 자체는 단지 프랑스 국내의 정치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건에 의해 고무된 자유, 평등정신은 절대왕정에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19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가 자유주의, 민주주의 확립에 큰 역할을 하였고, 마침내 프랑스 혁명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특권계급에 대한 시민계급의 반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사상과 문예사조 등에 의해서도 싹트기 시작하였으니, 18세기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이른바 계몽주의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이성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전통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19세기에 들어오자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냉철한 이성보다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합리적인 것보다는 공상적이고 환상적이며 목가적인 세계를 동경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먼저 개개인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낭만주의다. (문화사로부터 접근하는 서양음악사, 김승일, 예일출판사, 2009)

 

낭만주의라는 용어는 영어의 로맨티시즘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로맨티시즘이란 원래 로망스어로 씌어진 이야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로망스어란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늘어나고 인생, 종교, 경제, 정치 각 분야에서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고전주의의 엄격한 형식이나 규율 따위에 더 이상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마음껏 펼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황된 생각들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즉 자유롭고 신비하며 개성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동경하는 풍조가 바로 낭만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낭만주의는 18세기에 문학, 미술, 사상의 세계에서 먼저 개화했다. 음악 분야에서는 뒤늦게 1820년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낭만파 문학의 대표격인 문인들로는 슐레겔 형제, 바이런, 위고 등을 꼽을 수 있었다. 미술 분야에서는 들라크루아가 대표격이었다. 그의 그림은 순수한 회화적 표현력보다는 안에 담긴 스토리가 더 강렬한 호소력을 풍겼다. 낭만파 예술의 특징은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이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조는 민족주의 음악이었다. 고전주의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유럽 음악은 뿌리는 이탈리아, 줄기는 독일어권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큰 가지는 프랑스라고 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각국에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서곡<1812>에는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쳐들어갔다가 혹독한 추위,질병, 기아 등으로 인해 무참히 패배해 도망치는 광경이 그림처럼 극명하게 그려져 있다. 바로 그 해부터 위세등등하던 대영웅 나폴레옹의 기세도 한풀 꺾이고 3년 후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휘하의 동맹군에게 결정타를 맞아 재기불능이 되고 말았다. 세계제국의 꿈이 사라지자 각 나라 국민들은 독립을 서둘렀고 사회 전반에 민족의식이 팽배했다. 이러한 양상은 음악에도 반영되어 국민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음악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국의 풍경이나 전설, 민요 등을 채택해 그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풍부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민족주의 악파의 움직임이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는 러시아였다. 나폴레옹을 최초로 격파한 나라가 러시아였으니 제일 먼저 민족적 자각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재미있는 음악사 이야기, 신동헌, 서울미디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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