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과 나치즘

2019. 4. 18. 12:32세계사

파시즘과 나치즘 - 강렬한 스포츠 국가주의: 근대 스포츠가 국제화하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스포츠 국가주의는 올림픽과 월드컵의 인기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 민족주의 정서가 배어있지 않는 국제대회란 어떻게 보면 그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은 단순한 스포츠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1920~30년대 꽃을 피운 파시즘과 나치즘은 그들의 정치적 이념을 위해 스포츠 국가주의를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갔으며, 국제 스포츠의 지형을 완벽하게 국가 간 대립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930년대 스포츠와 강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향한 국민적 대단결로 귀결될 수 있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강한 체력이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 이후 체육활동을 강조했다. 더 이상 이탈리아의 스포츠는 순수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활동이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됐다. 특히 이탈리아는 젊은이들의 체육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대학교 체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이들은 국제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탈리아 파시즘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만들어 낸 최고의 성과는 1934년과 1938년 월드컵 우승이었다. 이미 무솔리니가 집권하기 전부터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이탈리아 축구는 파시즘의 광풍 속에서 월드컵 우승으로 완벽하게 이탈리아의 중요한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의 월드컵 우승은 하나의 이정표였으며 파시스트 당원들의 절대적 성원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논란거리가 있었다. 바로 오리운디oriundi에 대한 문제였다. 오리운디는 이탈리아에서 남미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돼 여전히 농촌사회였던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주로 경제적 이유로 1914년까지 500~600만 명이 남미로 떠났다. 이들 가운데는 주로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탈리아 혈통 이민자들이 꽤 있었다. 전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탈리아는 이 선수들의 이중국적을 허용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오리운디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탈리아 국민으로서 그들의 애국심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축구협회와 무솔리니 정권은 이탈리아에 대한 애국심이 있다면 오리운디가 대표팀에서 뛰는 것도 무방하다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비록 일부 오리운디들은 남미에서 터득한 개인 드리블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팀 전체에 해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나치즘도 파시즘과 비슷한 방향에서 국가 스포츠 진흥정책을 폈다. 특히 나치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대에서 체육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또한 미래의 나치 전사를 키워야 하는 건강한 엄마를 육성하기 위해 여성들의 체육활동도 강조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독일 여자선수들이 무려 45개의 메달을 거머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달랐다. 히틀러의 내면세계는 스포츠맨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으며 대체로 영국에서 태동한 근대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1936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히틀러가 국가 지도자로 선출되자 올림픽 개최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모든 국가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치 정권의 선전을 위한 정치도구로 전락한 베를린올림픽은 유대인 차별을 비롯해 올림픽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스포츠 경쟁: 2차대전이 끝난 뒤 전체주의자들이 이끈 스포츠의 정치화는 변모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는 스포츠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보이려고 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이를 막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냉전은 이렇게 시작했다. 정치학적으로 냉전은 상대의 핵공격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한 군비경쟁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하지만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두 진영은 음악, 미술 등 문화와 각종 스포츠 분야에서 치열한 대리전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약 40년 간 지속된 스포츠 냉전시대는 공산주의 스포츠가 득세하면서 본격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산주의 스포츠 시스템을 만들어 낸 소련의 역할은 이런 점에서 간과하기 힘들다. 그들이 창조해 낸 '운동기계'들이 등장하면서 다른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도 좀 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해 스포츠 선수를 육성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스포츠 시스템은 1923년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당은 체력 단련뿐 아니라 스포츠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클럽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클럽들은 일터를 중심으로 조직됐다. 협동농장에서 조직된 클럽에는 스파르타크(Spartak)라는 이름이 붙었고 군대에는 TsSka, 그리고 비밀경찰 조직에는 디나모라는 이름이 적용됐다(Guttmann, 2004).

 

소련 스포츠 최대의 제전인 스파르타키아드(Spartakiad)1956년에 개최됐다. 사실상 건강한 소련인이라면 모두 참가를 해야 했던 이 대회는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4년마다 한 번 열렸다. 대부분 참가자들은 예선전에서 탈락했고 일부 뛰어난 선수들은 소련과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대회는 국가 동원 체제에서 국가 스포츠의 전형을 보여 주는 거대한 행사였다(Riordan, 1980).

 

소련이 집중한 것은 엘리트 스포츠의 집중 육성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종 클럽에서 어린 유망주를 선발해 중앙에서 국제 대회를 위해 훈련시키는 시스템이었다. 이와 같은 소련의 엘리트 스포츠 집중 육성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1952년 올림픽에 데뷔한 소련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을 제외하면 1992년까지 라이벌 미국을 압도했다(Peppard & Riordan, 1993).

 

소련의 국가 아마추어 선수들은 미국의 대학생 아마추어 선수들보다 올림픽이 더 절실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경우 안락한 주택, 자동차와 현금 상금을 받았으며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에서 극소수의 간부급 엘리트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한마디로 올림픽은 소련 스포츠 유망주들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였다(Peppard & Riordan, 1993).

 

올림픽 왕국 소련의 위세는 아마추어리즘의 마지막 보루였던 서구 스포츠의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소련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은 선수들에게 과학적인 훈련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점차 승리지상주의에 매몰됐다. 미국보다 그 정도는 약했지만 영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있던 영국 조정계는 소련이 국제 무대에서 조정 강국으로 등장하자 1956년 하나로 통합됐다. 새롭게 탄생한 영국 조정 협회는 영국 조정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위해 노팅엄 근처에 국가 조정 경기장을 세웠고 체코슬로바키아 코치까지 영입해 대표 선수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영국 조정 선수들은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에 가까워진 셈이다(Holt & Mason, 2000).

 

이는 사실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했다. 올림픽 참가국 숫자가 늘어나면서 거의 모든 국가의 스포츠 대표 선수들은 국가로부터 직·간접적 지원을 받았다. 승리를 위해 각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 속에서 이러한 지원 없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국은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를 겨냥해 태릉선수촌을 세웠고 체육연금제도와 병역 혜택 제도도 마련했다. 이처럼 한국도 냉전 시대에 국가 주도형 체육 진흥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 국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허진석, 2010).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동구권 스포츠에서는 금지 약물 복용 문제가 만연했다. 이는 소련보다 동독에서 더 악명 높았다. 인구가 적지만 동·하계 올림픽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동독은 여자 선수들이 매우 많은 메달을 따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독 여자 선수들은 여자 선수가 딸 수 있는 전체 메달의 45.4 %를 휩쓸었다. 하지만 이 같은 여자 선수들의 활약에는 약물 복용 효과가 있었다. 일부 여자 육상 선수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도핑 테스트에 걸려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캐나다의 스프린터 벤 존슨(Ben Johnson)이 복용한 금지 약물보다 2배 이상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을 정도였다.

 

동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인공 국가였다. 동독은 국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국가 정체성이 필요했고 스포츠가 적극 활용됐다. 그 핵심 인물은 동독 올림픽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만프레드 에발트(Manfred Ewald)였다. 1968IOC로부터 하나의 국가 올림픽위원회로 인정받은 동독은 1972년 처음으로 동독이라는 국호로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다. 신생 국가 동독이 스포츠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Tomlinson & Young, 2006). 이후 에발트는 동독 스포츠의 번영을 위해 금지 약물 복용을 지시하거나 때로는 묵인했다. 동독이 따낸 숱한 금메달 속에 숨겨진 검은 역사였다.

 

올림픽을 마치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벌이는 청·백전 대결로 만들어 놓은 스포츠 냉전 시대가 남긴 흔적은 아직도 선명하다. 올림픽 이념과 상반되는 승리지상주의는 소련이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한 1952년부터 시작했다. 대회가 끝난 뒤 소련과 미국의 언론은 서로 다른 올림픽 경기 결과를 발표했다. 소련의 언론은 그들이 정한 포인트 시스템에 따라 소련의 승리를 발표했으며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련 언론이 당시 발표한 포인트 시스템은 오류가 있었다. 2002년 그 방식대로 다시 계산을 해 본 결과 미국의 근소한 승리로 판명이 났다(Parks, 2007). ‘승리진실보다 중요해진 스포츠 냉전 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잘못된 결과를 발표한 신문은 소련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였다. ‘프라우다는 진실이라는 뜻이다. (스포츠 문화사, 이종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80년대, 스포츠광 대통령을 두다: ‘3S’80년대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3S는 섹스Sex, 영화Screen, 스포츠Sports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정권에 의한 우민화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스포츠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 집권 초였던 1981년에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개최가 결정됐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도 전두환 정권 초기에 출범했다. 야구와 축구가 국민적 인기를 끌고 있었고, 스포츠를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기에 프로화가 가능했지만, 정책 당국자의 적극적 의지도 프로 스포츠 출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구와 농구도 사실상 세미 프로의 성격을 띤 리그전으로 발전했다. 최고 권력자 스스로가 스포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내보였다. 전두환은 많은 체육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베풀었다. 복싱 세계타이틀매치에서 한국 선수가 승리하면 예외 없이 대통령이 축전을 보냈다. 대통령은 수시로 태릉선수촌을 방문했고, 대통령과 악수 한 번 안 해본 체육인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통령은 스포츠 무대에 자주 등장했다.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종종 국운융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회자됐다. 스포츠를 통한 정치적 상징 조작은 분명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스포츠팬에게 80년대는 천국이었다. 무엇보다도 스포츠 중계가 많았다. 동남아에서 열리는 축구경기를 위성중계(당시 위성중계는 흔하지 않았다)해 주는 것을 비롯해 각종 스포츠중계가 줄을 이었다. 국내경기 중에는 단연 야구중계가 으뜸이었다. 80년대 초 국민스포츠라고도 부를 수 있었던 고교야구대회가 열릴 때는 TV중계는 기본이었고, 당시까지 KBS와 분리되지 않았던 교육방송 채널까지 동원해 고교야구를 중계했다. 정수라의 <! 대한민국>이 국민가요처럼 흘러나왔고, 스포츠에서의 승리를 국운의 상승으로 연결했던 대통령의 흥분된 언사가 잇따랐던 그 시절, 광주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대학생들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80년대는 즐겁고도 슬픈 시대였다. (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 한국사, 남정석 외, 이콘, 2012)

 

 

 

 

 

 

체육관gymnasium 체육관에서 하는 경기 체조gymnastics

 

 

gymnasium은 고대 그리스의 연무장 즉, 무예를 연습하는 곳 gymnasium은 고대 그리스에서 나체로 체력을 단련한 데서 나온 말이며, 나체의, 벌거벗은 등의 뜻인 gymno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금도 gymnosophists'나체 수행자' '나체주의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수행하다, 연마하다 등의 뜻은 지금도 남아 있어, 독일에서는 이 gymnasium을 대학교 가기 전의 9년제 교육기관, 김나지움이라고 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명철의 스포츠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체조(1)..체조는 곧 체육이던 시절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체조는 생활 밀착형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학창 시절 국민체조를 한 경험을 갖고 있다. 체조는 건강을 유지하고 신체 발달을 돕기 위해 맨손 또는 기계나 기구를 사용해서 하는 운동이다. 근력을 키우고 유연성과 순발력 등 운동 능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체조는 맨손체조와 기계체조, 기구체조로 나눌 수 있다. 맨손체조는 생활 속에서 즐기는 운동이고 기계체조는 1896년 제1회 아테네 대회부터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올림픽에서 열린 전통의 종목이다. 기구체조 가운데 리듬체조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트램펄린은 2000년 시드니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체조의 영어 명칭은 짐내스틱스(gymnastics)’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김노스(gymnos)’, 나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벌거벗고 일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은 그리스인들이 실제로 나체로 경기를 벌인 것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형태는 지금의 체조와 다르다. 그리스 시대의 체조는 달리기와 복싱이 주된 종목이었다. 나중에는 여기에 던지기 등의 종목이 추가돼 오늘날의 육상경기와 복싱 같은 종목을 아우르는 말이 됐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우리나라 스포츠 여명기에 체조가 체육(스포츠)을 뜻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독일 체조와 스웨덴 체조, 덴마크 체조로 대표되는 유럽 체조는 나라의 힘을 키우는 수단의 하나로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보급됐다.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는 데서 나온 국가주의 체육은 열강들의 침략에 국가 존립을 위협 받고 있던 19세기 말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과 선각자들이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교과 과목을 보면 한문과 영어, 만국지지(세계지리), 사민필지(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 두어야 할 상식), 위생, 창가, 도화 등인데 체조가 들어 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교육이 본격화되고 1895년 학교 설치령에 의해 최초의 공립학교인 한성사범학교의 설립이 공포됐다. 한성사범학교 교칙에는 신체의 건강이 성업의 기본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사범학교 전 과정에 체조를 과목으로 두었다.

 

그해 외국어학교의 설립이 공포됐는데 6개 분교로 이뤄진 외국어학교는 근대 한국 체육사에서 체육을 가장 강조한 학교로 꼽힌다. 외국어학교에서는 병식체조(군대식 체조) 등을 가르쳤고 외국인 교사들이 여러 가지 근대 스포츠를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보급했다. 외국어학교에서는 체조가 임의 과목이었으나 외국어학교의 분교인 일본어학교나 영어학교 등에서는 체조를 과외 활동으로 필수 과목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다.

 

1906년 발표된 외국어학교령에 따라 모든 학년에 주당 3시간씩 체조 과목을 배당했으며 이 시기에 설립된 무관학교, 상공학교, 의학교 등도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과 함께 체조를 교과 과목으로 채택했다. 당시 각급 학교의 체육 교과 과목은 체조였지만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각급 학교의 체육 시간은 체조로 불렸다. 체조 시간에 달리기도 하고 구기 종목도 했다. , 체조=체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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