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조와 민족주의

2019. 4. 18. 12:40세계사

1. 얀의 체육: 국가주의 운동과 결부된 체육을 전개한 가장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애국자는 얀Jahn이었다. 그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독재정치를 퇴치할 수 있는 결집력을 지닌 강건한 시민을 육성하는데 체육의 최고목적을 두었다. '원기있게, 자유롭게, 명랑하게, 경건하게'라는 구호 아래 사상 최초로 일반인의 민중운동참가를 독려하였다. 민중은 국가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의 자유도 함께 확보하며, 민중의 권리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정신을 가짐과 동시에 체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차 위대한 독일을 건설하는 관건은 국민들의 정신적 도덕적 활력을 증대시키는 데 있다고 인식했다. 얀은 학교 교사로서 사회 첫 출발을 하였는데, 당시의 학교관례에 의하면 수요일과 토요일은 반휴일로서 오후에 수업을 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가끔 야외로 나가 탐구활동을 하였다. 얀은 학생들의 이러한 활동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처음에 소규모로 남학생들을 야외로 인솔하여 그들에게 매우 활발한 신체운동을 하도록 권장하였다. 이들과 함께 야외 신체활동을 하면서 얀은 던지기를 위한 수직봉, 간이 높이뛰기대 등 원시적인 체조기구를 고안하였으며, 이러한 약식 운동을 기초로 하여 체조장이란 아이디어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체육에 대한 신념은 애국적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강인하고 용감한 젊은이의 성장·발달에 기대하여야 하며 독일의 탁월성이 존속되려면 활력 있는 젊은 세대에 달려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운동경기의 위대한 힘에 착안하였으며, 체육을 국가 재건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얀에 의한 체조가 독일 전체에 보급되자, 체조협회가 결성되어 많은 회원이 가입하였다. 18116월에 얀은 베를린 교외에 체조장을 설치하였고, 그의 동료교사인 프리이젠이 얀을 도와서 이를 운영하였다. 이 체조장은 고대 그리스의 팔래스트라를 모방한 것으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학생들은 동일한 운동복을 착용하여 의복에서 노출되는 신분의 격차를 없애고 사회적 평등감을 가지게 하였는데 이것은 봉건적 사고가 잔존한 당시로서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얀은 체조운동에 참가하려는 열망은 가지고 있지만 시간이 없어 참가하지 못하는 성인들을 위하여 일요일과 기타 공휴일에는 체조장의 시설을 그들에게 개방하였다. 1812년 체조장을 확장하고 달리기트랙, 평행봉(최초), 도약대(도마), 매달리기와 오르기 기구 등의 각종 새로운 운동시설을 추가하였다. 때때로 수백 명의 견학자들이 체조장 주위에 줄을 서서 운동자의 운동광경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1813년 해방전쟁이 발발하자 얀과 프리이젠은 나폴레옹의 지배에서 독일을 해방하고자 독일군에 제일 먼저 입대했다. 대부분의 체조가들도 그를 따라 곧 지원하게 되었다. 얀은 군에서 돌아와 동료들과 같이 연구하고 경험한 결과를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독일체조술>이다.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전독일에 애국주의 이상이 강조됨으로써 체조운동은 보다 철저히 조직화되어 전 국민이 체조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때 얀은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었고 독일의 여타 주에서는 얀의 책을 지침으로 하여 체조운동의 구성과 관리를 하도록 하였다. 얀은 독일체조의 창시자이며, 체조협회의 선구자로서 체조운동을 통한 독일의 해방과 통일, 자유의 쟁취를 이룩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얀의 체조는 협회를 중심으로 일반 국민에게 보급되었지만, 체조의 내용은 학교의 교육, 특히 여자와 아동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1842년 이래 프러시아에서 초등학교 교육에 체조의 도입을 강조하고, 독일체조를 학교체육에 적합하게 구성한 사람은 아돌프 스피이스(Adolph Spiess 1810~58) 그는 페스탈로찌, 구츠무츠의 영향을 받아 전인적 교육의 일환으로서 신체운동의 교육적 가치, 도덕적 사회적 훈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기계를 이용하는 체조 외에 맨손체조, 행진체조, 음악을 이용하여 여자와 아동에게 적합한 운동을 실시하였다(독일의 학교체육, 여자체육의 아버지). 그의 취지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체육이념과 같은 것이었으며 "체육은 신체의 완전한 발달을 도모하고 신체의 미와 기품을 길러 신체와 정신을 융합하여 이상적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완전한 조화를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학생의 인간성 전체에 미치는 것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지능과 신체를 합쳐 한 개의 인간을 구성한다"라고 하였다. 학교가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아동의 전생활에 관여하여야만 된다는 원칙은 점차 널리 전파되어 독일의 교육당국은 스피이스의 체조를 학교의 기본 프로그램으로 채용하였다. (서양 스포츠 문화사, 이제홍, 대경북스, 2006)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그들은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하는 통치이념을 신속히 확립하였으며 체육에 있어서도 국가주의적, 군사적 목적을 확립하였다. 나치는 군비를 증강하기 위하여 사회 각계각층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을 막중한 임무로 생각해야 하며, 이러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데 대하여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히틀러는 자신이 구상하는 학교의 성격에 대하여 "민족국가는 모든 교육제도의 역점을 공허한 지식주입에 둘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건강한 신체의 개발에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나치에게 있어서 체질이 허약한 아동은 국가의 부채이며, 건강한 청소년은 국가의 자산으로 생각되었다. 3제국이 필요로 한 것은 국가의 자산이었던 것이다. 나치는 개인의 성격개발을 교육목적으로 삼는 것은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처사라고 강하게 비난해서 아동중심의 학교가 아니라 국가중심의 학교를 원했던 것이다. 체육활동에 대해서도 "체육, 스포츠는 개인의 사적인 향락이 아니다. 신체운동은 국민생활의 실질적인 한 부분이며 국가교육의 기본요소이다. 그렇게 때문에 체육, 스포츠활동은 개인주의가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며, 국가주의적 관심으로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나치의 교육과정은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규율과 힘겨운 신체활동으로 편성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소산이 바로 히틀러 소년단이었다.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광신적인 충성과 맹목적인 용기, 철저한 군인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체육세계사, 오동섭, 형설출판사, 2001)

 

2. 파시즘과 나치즘 - 강렬한 스포츠 국가주의: 근대 스포츠가 국제화하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스포츠 국가주의는 올림픽과 월드컵의 인기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 민족주의 정서가 배어있지 않는 국제대회란 어떻게 보면 그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은 단순한 스포츠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1920~30년대 꽃을 피운 파시즘과 나치즘은 그들의 정치적 이념을 위해 스포츠 국가주의를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갔으며, 국제 스포츠의 지형을 완벽하게 국가 간 대립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930년대 스포츠와 강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향한 국민적 대단결로 귀결될 수 있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강한 체력이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 이후 체육활동을 강조했다. 더 이상 이탈리아의 스포츠는 순수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활동이 아니라 국가 발전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됐다. 특히 이탈리아는 젊은이들의 체육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대학교 체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이들은 국제대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탈리아 파시즘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만들어 낸 최고의 성과는 1934년과 1938년 월드컵 우승이었다. 이미 무솔리니가 집권하기 전부터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이탈리아 축구는 파시즘의 광풍 속에서 월드컵 우승으로 완벽하게 이탈리아의 중요한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의 월드컵 우승은 하나의 이정표였으며 파시스트 당원들의 절대적 성원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논란거리가 있었다. 바로 오리운디oriundi에 대한 문제였다. 오리운디는 이탈리아에서 남미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돼 여전히 농촌사회였던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주로 경제적 이유로 1914년까지 500~600만 명이 남미로 떠났다. 이들 가운데는 주로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탈리아 혈통 이민자들이 꽤 있었다. 전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탈리아는 이 선수들의 이중국적을 허용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에 오리운디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탈리아 국민으로서 그들의 애국심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축구협회와 무솔리니 정권은 이탈리아에 대한 애국심이 있다면 오리운디가 대표팀에서 뛰는 것도 무방하다는 실용주의를 택했다. 비록 일부 오리운디들은 남미에서 터득한 개인 드리블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팀 전체에 해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나치즘도 파시즘과 비슷한 방향에서 국가 스포츠 진흥정책을 폈다. 특히 나치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대에서 체육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또한 미래의 나치 전사를 키워야 하는 건강한 엄마를 육성하기 위해 여성들의 체육활동도 강조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독일 여자선수들이 무려 45개의 메달을 거머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달랐다. 히틀러의 내면세계는 스포츠맨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으며 대체로 영국에서 태동한 근대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1936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히틀러가 국가 지도자로 선출되자 올림픽 개최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모든 국가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치 정권의 선전을 위한 정치도구로 전락한 베를린올림픽은 유대인 차별을 비롯해 올림픽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스포츠 경쟁: 2차대전이 끝난 뒤 전체주의자들이 이끈 스포츠의 정치화는 변모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는 스포츠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보이려고 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이를 막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냉전은 이렇게 시작했다. 정치학적으로 냉전은 상대의 핵공격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한 군비경쟁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하지만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에 두 진영은 음악, 미술 등 문화와 각종 스포츠 분야에서 치열한 대리전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약 40년간 지속된 스포츠 냉전시대는 공산주의 스포츠가 득세하면서 본격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산주의 스포츠 시스템을 만들어 낸 소련의 역할은 이런 점에서 간과하기 힘들다. 그들이 창조해 낸 '운동기계'들이 등장하면서 다른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도 좀 더 적극적인 정부개입을 통해 스포츠 선수를 육성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스포츠 시스템은 1923년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당은 체력단련뿐 아니라 스포츠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클럽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클럽들은 일터를 중심으로 조직됐다. 협동농장에서 조직된 클럽에는 스파르타크Spartak라는 이름이 붙었고, 소련 스포츠 최대의 제전인 스파르타키아드Spartakiad1956년에 개최됐다. 사실상 건강한 소련인이라면 모두 참가를 해야 했던 이 대회는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4년마다 한 번 열렸다. 이 대회는 국가동원체제에서 국가 스포츠의 전형을 보여 주는 거대한 행사였다. 소련이 집중한 것은 엘리트 스포츠의 집중육성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종 클럽에서 어린 유망주를 선발해 중앙에서 국제대회를 위해 훈련시키는 시스템이었다. 이와 같은 소련의 엘리트 스포츠 집중육성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올림픽 이념과 상반되는 승리지상주의는 소련이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한 1952년부터 시작했다. 소련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을 제외하면 1992년까지 라이벌 미국을 압도했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경우 안락한 주택, 자동차와 현금 상금을 받았으며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에서 극소수의 간부급 엘리트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한마디로 올림픽은 소련 스포츠 유망주들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였다. 올림픽 왕국 소련의 위세는 서구 스포츠의 변화를 이끌었다. 올림픽을 마치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벌이는 청·백전 대결로 만들어 놓은 스포츠 냉전시대가 남긴 흔적은 아직도 선명하다. 소련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은 선수들에게 과학적인 훈련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점차 승리지상주의에 매몰됐다. 미국보다 그 정도는 약했지만 영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사실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했다. 올림픽 참가국 숫자가 늘어나면서 거의 모든 국가의 스포츠 대표 선수들은 국가로부터 직·간접적 지원을 받았다. 승리를 위해 각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 속에서 이러한 지원 없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국은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를 겨냥해 태릉선수촌을 세웠고 체육연금제도와 병역혜택 제도도 마련했다. 이처럼 한국도 냉전시대에 국가주도형 체육진흥정책을 실시한 대표적 국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동구권 스포츠에서는 금지약물 복용문제가 만연했다. 이는 소련보다 동독에서 더 악명 높았다. 인구가 적지만 동·하계 올림픽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동독은 여자선수들이 매우 많은 메달을 따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독 여자선수들은 여자선수가 딸 수 있는 전체 메달의 45.4%를 휩쓸었다. 하지만 이 같은 여자선수들의 활약에는 약물 복용 효과가 있었다. 동독은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국가였다. 동독은 국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국가정체성이 필요했고 스포츠가 적극 활용됐다. 1968IOC로부터 하나의 국가 올림픽위원회로 인정받은 동독은 1972년 처음으로 동독이라는 국호로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다. 신생국가 동독이 스포츠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지만, 동독 스포츠의 번영을 위해 금지약물 복용을 지시하거나 때로는 묵인했다. 동독이 따낸 숱한 금메달 속에 숨겨진 검은 역사였다.

(스포츠문화사, 이종성,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3. 80년대, 스포츠광 대통령을 두다: 3S80년대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3S는 섹스Sex, 영화Screen, 스포츠Sports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정권에 의한 우민화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스포츠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 집권 초였던 1981년에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개최가 결정됐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도 전두환 정권 초기에 출범했다. 야구와 축구가 국민적 인기를 끌고 있었고, 스포츠를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기에 프로화가 가능했지만, 정책 당국자의 적극적 의지도 프로 스포츠 출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구와 농구도 사실상 세미 프로의 성격을 띤 리그전으로 발전했다. 최고 권력자 스스로가 스포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내보였다. 전두환은 많은 체육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베풀었다. 복싱 세계타이틀매치에서 한국 선수가 승리하면 예외 없이 대통령이 축전을 보냈다. 대통령은 수시로 태릉선수촌을 방문했고, 대통령과 악수 한 번 안 해본 체육인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통령은 스포츠 무대에 자주 등장했다.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종종 국운융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회자됐다. 스포츠를 통한 정치적 상징 조작은 분명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스포츠팬에게 80년대는 천국이었다. 무엇보다도 스포츠 중계가 많았다. 동남아에서 열리는 축구경기를 위성중계(당시 위성중계는 흔하지 않았다)해 주는 것을 비롯해 각종 스포츠중계가 줄을 이었다. 국내경기 중에는 단연 야구중계가 으뜸이었다. 80년대 초 국민스포츠라고도 부를 수 있었던 고교야구대회가 열릴 때는 TV중계는 기본이었고, 당시까지 KBS와 분리되지 않았던 교육방송 채널까지 동원해 고교야구를 중계했다. 정수라의 <! 대한민국>이 국민가요처럼 흘러나왔고, 스포츠에서의 승리를 국운의 상승으로 연결했던 대통령의 흥분된 언사가 잇따랐던 그 시절, 광주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대학생들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80년대는 즐겁고도 슬픈 시대였다. (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 한국사, 남정석 외, 이콘, 2012)

 

4.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체조: 체조는 생활 밀착형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학창 시절 국민체조를 한 경험을 갖고 있다. 체조는 건강을 유지하고 신체 발달을 돕기 위해 맨손 또는 기계나 기구를 사용해서 하는 운동이다. 근력을 키우고 유연성과 순발력 등 운동 능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체조는 맨손체조와 기계체조, 기구체조로 나눌 수 있다. 맨손체조는 생활 속에서 즐기는 운동이고 기계체조는 1896년 제1회 아테네 대회부터 2016년 제31회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올림픽에서 열린 전통의 종목이다. 기구체조 가운데 리듬체조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트램펄린은 2000년 시드니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체조의 영어명칭은 짐내스틱스gymnastics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짐노스gymnos, 나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벌거벗고 일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은 그리스인들이 실제로 나체로 경기를 벌인 것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형태는 지금의 체조와 다르다. 그리스 시대의 체조는 달리기와 복싱이 주된 종목이었다. 나중에는 여기에 던지기 등의 종목이 추가돼 오늘날의 육상경기와 복싱 같은 종목을 아우르는 말이 됐다. 독일 체조와 스웨덴 체조, 덴마크 체조로 대표되는 유럽 체조는 나라의 힘을 키우는 수단의 하나로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보급됐다.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는 데서 나온 국가주의 체육은 열강들의 침략에 국가 존립을 위협받고 있던 19세기 말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과 선각자들이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교과 과목을 보면 한문과 영어, 만국지지(세계지리), 사민필지(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 두어야 할 상식), 위생, 창가, 도화 등인데 체조가 들어 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교육이 본격화되고 1895년 학교설치령에 의해 최초의 공립학교인 한성사범학교의 설립이 공포됐다. 한성사범학교 교칙에는 신체의 건강이 성업의 기본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사범학교 전 과정에 체조를 과목으로 두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무관학교, 상공학교, 의학교도 체조를 교과과목으로 채택했다. 당시 각급 학교의 체육 교과과목은 체조였지만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각급 학교의 체육시간은 체조로 불렸다. 체조시간에 달리기도 하고 구기종목도 했다. , 체조=체육이었다. (신명철의 스포츠뒤집기, http://www.spotvnews.co.kr,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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